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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Oct 24. 2021

#7. 부동산과 자식교육

- 증식하지 못한 자본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한 푼 두 푼 모아 큰 데 써야 한대이.”


어머니가 늘 하시는 말씀이다. 우리 어머니들은 그렇게 사셨다. 난방을 절약하기 위해 내복을 입고,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설거지하는 것이 아까워 물을 고아 쓴다. 장을 보러 가면 무조건 한 푼이라도 더 깎는 것, 그게 알뜰한 주부의 미덕이었다. 심지어 내 친구 어머니는 상가 건물을 두 채나 갖고 있는데, 소변보고 내리는 물이 아까워 시댁에 가면 늘 화장실 냄새가 난다고 했다.


자본주의 부흥기. 우리의 조부모들은 전쟁의 폐허 위에 건물을 올리고 외화를 벌어들여 GDP 10위 안에 드는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그들은 남편이 벌어오는 쥐꼬리만 한 월급을 그렇게 모아 아이를 대학에 보내고, 내 집 장만을 하고, 기득권이 되었다. 지금의 풍요와 번영은 모두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가가호호 대한민국을 빽빽하게 채운 건물들의 주인이 누군지 물어보라. 이것이 여태 그들의 방식이 옳았다는 증거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강남이었다. 내가 살던 고층 아파트 뒤쪽으로는 저층 주공아파트들이 끝도 없이 들어서 있었지만, 베란다 앞쪽은 여전히 비만 오면 맹꽁이가 울어대는 논밭이었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 그곳은 물을 채워 임시 스케이트장으로 변신한곤 했다. 볼을 빨갛게 하고 신나게 얼음을 지치다가 역시 임시로 설치된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사 먹던 어느 겨울 오후가 생각난다. 얼얼했던 발목이 스케이트 날을 곧추세워 볏짚과 진흙이 뒤엉킨 바닥을 조심스럽게 내디디던 오후가.


그곳이 지금의 스타팰리스다.


생각해보면 나의 부모님은 참 운이 좋았다. 강남이 20년 후에 대한민국 부의 상징으로 불릴 거라는 걸 1도 모르던 시절, 그곳에 터를 잡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안정적으로 다니던 신문사를 때려치우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기 시작하면서 우리 집은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우리가 아파트를 팔고 변두리로 밀려나기 시작할 때, 친정 엄마를 따라 강남에 진출한 작은 이모는 은행에 근무하던 남편과 힘을 합세해 아파트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 시절은 '우연히' 강남에서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재산을 증식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때 우리 부모님이 재산을 불리는 데 조금 더 적극적이었다면, 아버지가 '딴짓' 하느라 아파트를 팔고 변두리로 밀려나지만 않았다면, 내 아이들도 지금쯤 강남에 건물 두 세채 정도는 가진 든든한 뒷배, 조부모의 후광을 입고 있을 터였다. 아이를 낳고 나서 친정 엄마 옆으로 이사가 강남을 기반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하던 내 친구들처럼, 친정이 강남이란 이유만으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작은 부동산 하나만 물려받아도 남편이 평생 벌어온 것보다 많은 유산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그 가능성 만으로도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는, 내 어린 시절 친구들처럼 말이다. 그랬다면, 나는 지금 좀 더 남편 앞에서 면이 섰을까.


시어머니 또한 지방이긴 해도 신혼을 100평짜리 주택에서 시작할 만큼 역시 운이 좋았다. 자본을 축적하고 불릴 만큼 여유가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돈이 돈을 낳는 방식을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집을 팔아 부동산에 투자하는 대신 교육에 올인했다. 그녀의 돈은 증식하지 못했다. 자본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공부만 잘하면 성공할 줄 알았던 아들의 성공 또한 그런 방식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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