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쏭마담 Oct 24. 2021

#9. 그 여자, 며느리

- 제아무리 며느리를 딸로 생각한들



결혼하던 당시 어머니는 내게 '뜻밖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시어머니와도 달랐다. 그 연배에 책을 가까이하는 여자였고, 말 한마디를 아껴하시는 어른이었다. 남편은 자라며 부모님이 싸우는 걸 본 적이 없다고도 했다. 온화함, 자상함, 배려와 교양. 현모양처에 걸맞은 그런 단어들은 모두 어머니를 수식하고 있었다.


맞벌이하며 남편에게 진저리를 칠 때, 남편 대신 말없이 육아를 도와주시던 분도 어머니셨다. 하루 아이를 맡아줄 테니 실컷 친구를 만나고 오라고 등 떠미셨고, 손주 먹이라고 매번 제철 과일과 쑥떡과 생선과 고기가 빽빽이 담긴 택배를 보내주셨다. 며느리 힘들까 봐 명절 전에 미리 전이며 온갖 음식을 준비해놓으시는 분이셨고, 바쁜 며느리 방해될까 봐 곱씹어 생각하고 한번 전화를 돌리는 분이셨다. 그 정도면 어느 해 당신의 고백처럼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한다'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분이 아들과 손주들에게 하는 그 사랑과 정성에 대해 내가 조금의 평이라도 얹고자 한다면 그건 배교나 마찬가지일 터. 그녀에게 가족은 종교였고, 인생의 전부였으니까.


그러니 어느 날 남편에 대한 분노가 더 이상 숨겨지지 않고 얼굴이나 말투 어딘가에서 뚝뚝 떨어져 도저히 한번 언급하지 않고는 안 되겠다 싶던 즈음. 어머니가 내게 하신 말씀은 분명 나를 위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네가 포기해라."


TV 앞에 앉아 졸고 있던 그가 안고 있던 아기를 떨어뜨렸을 때, 며느리의 분투를 지켜보던 어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거다. 해봐도 안되지 않더냐고. 네 아버지도 그랬다고. 이런 건 차원이 다른 사랑으로 품어야 해결되더라고. 그러면서 본인이 아들 몫까지 최선을 다해 도우셨다. 그렇게 하면 아들과 며느리 사이가 조금이라도 다시 접붙여지실 줄 알았던 거다. 하지만 어머니 뜻처럼 되지 않았다. 그 도움이 모자랐다는 말이 아니다. 차고 넘칠 만큼 감사했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보여주신 그 호의는 내 가슴에 두고두고 새겨졌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에 대한 미움이 덜해졌던가.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 남편의 자리였다. 그가 채워야 할 자리를 어머니가 채워줬다고 해서 남편이 용서되는 그런 아름다운 일은 없었다.


내 주변의 똑똑한 여자들은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우라"고 충고하던 시절이었다. 자랄 때 배우고 본 바가 없어서 그런 거니, 잘 못해도 자꾸 시켜야 한다고. 할 땐 티 하나 안나지만 안 하면 팍팍 티 나는 그 잔잔한 집안일이 얼마나 많은 손길과 노동력을 요구하는지는 직접 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다고.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을 서투르게나마 집안일에 참여시키는 것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들이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그걸 지켜봐야 하는 인내심이라고.


"포기하라"는 말. 며느리를 향한 어머니의 충고는 의심할 바 없는 진심이었다. 오랜 시간 쌓인 지혜로운 어른의 충고였고, 어머니가 나만 하던 때 어머니 자신을 살린 단어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효가 다한 언어였음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아내를 안사람, 남편을 바깥양반이라고 부르며, 아내에게는 자식 잘 건사하고 남편 잘 보필하고 시부모님 잘 공양하는 걸 최대의 가치로 삼던 시대의 가치. 어머니 자신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인 '현모양처'의 역할에 충실하게 사셨고, 그걸 이행했다고 내가 그녀를 어찌 평가하겠나.  


문제는 내 시대에서는 그걸 불평등한 것이며, 가부장제 시대가 낳은 구습이라고 말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돌아보니 어머니와의 어그러짐은 다 그런 방식으로 작동되었다.


우리가 자주 모이던 그때. 어머니는 모일 때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음식들을 준비하셨다. 좋은 음식을 먹이는 일은 그녀의 주된 가치였고, 그것을 맛있게 먹는 아들과 손자를 바라보는 건 가장 큰 기쁨이었다. 그녀에게 가족은 모이면 며칠 함께 먹고 함께 자야 하는 것 또한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명절이면 올라오실 때마다 며칠 함께 먹고 잘 짐이 한가득. 어느 날은 엄청나게 큰 캐리어 하나를 끌고 오셨는데 열어보니, 가방 전체가 다 고기였다. 소고기가 부위별로 빽빽했다. "어머니, 다른 짐들은요?" 했더니 달랑 작은 손가방 하나를 들어 보이시며 웃으셨다. 동네 사람들과 소 한 마리를 잡으셨다고 했다. 그 좋은 걸 자식과 손주들에게 빨리 먹이고 싶어 얼마나 안달하셨을까. 기차표가 아까워서 무궁화호를 타고, 택시도 한번 안 타시는 양반이 그 연약한 몸으로 그  무거운 걸 올렸다 내렸다 끌었다... 그건 명백히 자식을 향해 부르는 그녀의 세레나데였다. 어떤 며느리가 그 사랑에 감읍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족을 위한 그녀의 헌신. 며느리들 부담을 덜어주려는 그녀의 배려. 몇 년 간은 괜찮았다. 맞벌이하던 시기. 나는 상대적으로 음식 하는 일이 많지 않았고, 이렇게 한 번씩 둘러앉아 전을 부치고, 새로운 음식을 배우는 것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 일이 집 너머 스키장이나 여행지에서까지 반복되자 내 마음도 처음 같지 않았다.


남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스키장에 가기 전. 여자들은 아침부터 고기를 굽기 시작한다. 아침 먹은 걸 치우고 믹스커피를 한잔 마시다 보면 스키장에서 허덕거리며 남자들이 돌아온다. 여자들은 다시 고기를 구워 점심을 먹인다. 먹은 것을 치우고 나면 다시 저녁. 여자들은 남자들을 찜질방에 보내 기 전 다시 고기를 굽는다. 그렇게 2박 3일을 차리고 먹고 치우기를 반복한다. 캐리어가 조금씩 비어 가는 걸 지켜보는 그 일이 시어머니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며느리들에게 가족 모임은 어느 순간부터 언제나 음식을 차리고 음식을 치우는 것으로 끝나는 모임이 되었다. 그건 집이든 여행지든 마찬가지였다. 제아무리 어머니가 며느리 힘들까 봐 몸이 부서져라 음식을 준비해도, 시댁에서 남자들은 먹고 여자들은 줄곧 차리는 일이 반복되는 한 바뀔 수 없는 패턴이었다. 시어머니가 제아무리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고 싶어도, 며느리는 딸이 될 수 없었다. 음식에 대한 가치와 비중과 역할에 균열을 내지 않는 한, 그녀가 자기 시대의 가치를 버리고 우리 시대로 방향을 돌리지 않는 한 만나질 수 없는 진심.


결혼하고 15년. 우리는 예전처럼 이제 자주 모이지 않는다. 진실은 폭로되었고, 한때 그녀를 빛나게 하던 그 모든 가치들도 지금 재평가되고 있다. 진실은 명백하다. 우리가 서로에게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어서라는 것. 사회는 그걸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구조의 문제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부지런히 고민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대가는 개인이 치러야 한다. 우리는 지금 그 균열을 감당하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며느리의 배교에 너무 낙심하지 않기를 매일 기도하고 있다.



이전 08화 #8. 그 남자, 아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