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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Oct 24. 2021

#10. 어머니와 며느리

- 겨우 30년의 낙차



내 어머니와 내 세대를 극명하게 가르는 단어 몇 가지가 있다. 의무와 도리, 권위와 신념, 거대 담론, 이분법적 사고. 어머니 세대를 관통하는 단어들이다. 어머니는 유교적 잔재가 남긴 가부장이라는 거대한 세계가 지배하던 시대를 살았다. 제도적으로 철폐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계급과 신분이라는 수직적 질서의 그림자가 곳곳에 남아 있었고, '~해야 한다'로 규정된 당위와 의무로 움직이는 사회였다. 여자들은 그 시대가 규정한 가치에 부합하며 살면 착한 여자, 그 질서에 벗어나면 나쁜 여자가 되었다.


개인의 취향, 선택과 자유, 탈권위, 미시 담론, 상대적 해석과 다양성은 우리 세대를 가리키는 단어들이다. 우리는 자기 욕망을 감금당한 채 살아온 어머니들로부터 "너는 나처럼 살지 말라"는 하소연을 들으며 자랐고, 여자도 노력하기만 하면 어느 정도 남자와 비슷한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가질 수도 있게 되었다. 결혼과 출산은 의무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였고,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살아도 괜찮았다.


그 사이 벽이 너무 높게 느껴지던 어느 날. 문득 내 어머니와 내 나이를 계산해 보니 차이가 겨우 30년밖에 되지 않았다. 스무 살이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던 시대이니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는데도, 이 땅에 전쟁이 그친 지가 고작 70년 밖에 안됐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던 때만큼 놀라웠다. 늘 어머니 세대와 우리 세대를 전쟁 경험의 유무로 나누곤 하던 터라, 나이 격차에 대해서도 70년 정도는 되겠거니 생각하며 살았나 보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우리의 이 균열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고 위안하고 있었을까? 우리 세대를 가르고 우리를 좁힐 수 없게 하던 그 수많은 가치들의 낙차가 고작 2-30년이었다니! 그 사이 우리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페미니즘 입문서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전근대, 근대, 후기-근대를 거의 반세기 만에 경험한 사회죠. 서구 문명권에서 400년이 넘게 걸리며 진행된 것들을 이렇게나 빨리 해치웠어요. 서구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그러니까 전근대인 할머니, 근대인 어머니, 후기-근대인 딸이 ‘함께 살고 있는 사회’가 대한민국입니다. 세대 갈등이 유난 맞은 까닭도 여기 있지요." (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백소영 저. p.10)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 어머니가 결혼하고 우리를 키우던 시절엔 남편의 외벌이로 충분할 정도로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호황이었다. 중산층 비율은 급상승했고 여자들은 전업주부로의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만큼 여유로웠다. 그러니 그때만 해도 대다수 여자들은 여성 인권이니 구조적 문제에 관심을 가질 기회가 없었다. 이 사회의 '여성 응시'가 여전히 '근대적'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이유고, 지금 그 논쟁이 이렇게까지 격렬해진 이유다.


그러는 사이 한 세대가 갔습니다. 미국에서 반세기 전쯤에 중산층 여성들이 겪었던 제도적 혼란을 오늘날 대한민국 다수의 젊은 주부들과 2030 세대 딸들이 겪게 되었죠. 자기를 희생하며 전업주부로 최선을 다해 딸들을 훌륭한 전문가로 길러낸 엄마 세대 덕분에, 지금의 딸들은 그야말로 경쟁력 있는 주체가 되었어요. 그런데 이 사회의 ‘여성 응시’는 여전히 ‘근대적’인 겁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아빠는 출근하고 엄마는 가정을 지키는 근대적 기획은, 후기-근대를 살아가는 여성들 즉 바깥일을 하는 여성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구조라는 거예요. 우리나라는 이에 더하여 전근대적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여전히 가정 안에서 권위를 가지고 계시다 보니 ‘추석에 전 부치고’ 대가족 단위로 행사를 치르는  전통 사회의 일들까지 잔재해 있죠. 이런 '일상'을 사는 젊은 세대로서는 그야말로 타임 슬립을 하는 기분으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같은 책. p.10)


한마디로 밖에서는 남자처럼 똑같이 공부하고 일했는데, 집과 시댁으로 들어오면 여전히 근대 여자이길 바라는 시선과 역할이 기다리고 있던 게 우리 세대라는 거다.


아들만 공부 잘하면 성공할 줄 알고 키워진 게 아니었다. 딸도 또한 공부만 잘하면 되는 딸로 키워졌다. 딸의 세계는 급격히 변하고 있는데, 아들의 세계는 변하지 않았다. 여자들은 사회로 진출했는데, 남자들은 가정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남자들에게 가정은 여전히 쉬는 곳인데, 여자들은 일하는 곳이 되었다. 우리 시대의 비극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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