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폄하는 어디로부터 기인하는가
가사 노동 자체가 얼마나 오랫동안 형체 없이 존재해 왔는지 보여주는 얘기다.
맞벌이하던 시절. 우리 집에도 한동안 이모님 한분이 아이들을 돌봐주셨다.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 6시 퇴근하는, 근무시간으로 따지면 나와 똑같은 풀타임 근무였다. 공식적으론 아이를 봐주는 일이었지만, 된장도 후딱 잘 끓여 아이들 먹이고 빨래도 돌려주시는, 실질적으로 집안일까지 다 해주셨다. 하지만 이모님의 월급은 당시 시세보다 조금 더 쳐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론 내 월급의 1/3 정도밖에 안 됐다. 그 후 내가 회사를 그만 두자 이모님과의 연락도 차츰 멀어지고 말았는데... 올해, 명절을 앞두고 실로 오랜만에 이모님이 전화를 주셨다.
"은주 씨. 잘 지내죠? 내가 사과 한 박스 보내주려고 하는데... 주소 좀 불러봐요."
전화기 너머 이모님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훨씬 더 활기가 넘쳤다. 이런저런 아이들 안부며 소식을 나누던 중 그간 이모님의 삶의 이력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우리와 헤어진 뒤 직업소개소를 통해 소개받은 집들마다 계속 좋은 사람들을 잘 만났다고 했다. 집을 옮길 때마다 이모님의 몸값은 점점 뛰었고, 지금은 한남동에서 아이 둘을 돌봐주고 있다고 했다. 무슨 비트코인으로 성공한 젊은 사업가의 집인데, 3교대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밥해주고 청소해주는 사람도 다 따로 있다고 했다. 네에? 아이 돌보는 사람만 3명이라고요? 내가 호들갑을 떨며 되묻자, 이모님이 수줍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고, 월 400 받아요."
맞벌이하던 당시, 가끔 어머니가 집에 올라와 여자 셋이 며칠씩 함께 지내던 때 이야기. 그때도 손이 컸던 이모님은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시면서도 애들 먹이라고 제철 과일은 물론 집에서 담근 게장이며 끓인 국을 한솥씩 짊어지고 환하게 웃으며 현관문으로 걸어 들어오시곤 했다. 그런 이모님을 두고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있다. “다 좋은 데, 낭비가 좀 심하다.” 어머니 입장에서 여자라면 모름지기 한 푼 두 푼 모아,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아껴서, 빨리 방 한 칸이라도 마련할 궁리를 해야 하는데, 도무지 이모님은 그래 보이지 않았던 거다. 버는 족족 쓰고 내 것 네 것 없이 퍼다 나르는 방식은 영락없이 가난의 꼴을 벗어나지 못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모님이 '큰 손'은 자기 노동을 팔아 번 돈이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10년 전 GDP를 움직이며 당당히 노동을 팔아 살던 나는 돌봄과 가사노동이라는 '집안'으로 들어왔다. 남편의 쥐꼬리만 한 월급을 한 푼 두 푼 아껴, 아니, 남편에게 빨대 꽂아 단물만 쏙쏙 빠는 여자가 되었다. 10년 전 돌봄과 가사노동을 가지고 '바깥'으로 진출한 이모님은 노동시장에서 당당히 자신의 노동을 팔아 GDP에 일조하는 커리어우먼이 되었다. 10년 만에 돌봄과 가사노동은 노동 가치 교환가치를 인정받는 고부가 가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불과 100여 년 전, 돌봄과 가사노동은 남자들처럼 직업을 구할 수 없고 남편을 얻을 수 없었던 여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여자라면 남자를 위해, 어머니라면 아들을 위해 당연하던 제공되어야 하는 수고였다. 하지만 지금, 남자들의 그늘에 갇혀 유령처럼 존재하던 여성의 돌봄과 가사노동이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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