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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사람은 언제까지 약자여야만 하는 걸까

환자라서 느낄 수 밖에 없는 마음들에 관해

1달 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건강검진을 받았다. 의사는 직장 외부에 압박의심 소견이 있다며 진료요청서를 써줄 테니 상급병원으로 전원 하라고 했다.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지만 애써 담담한 척 병원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와 인근 대학병원 여러 군데에 전화를 돌렸다. 유명한 의사들은 이미 1년 치 예약이 다 잡혀 있다고 했다. 나는 어렵사리 일반의사에게 1달 뒤로 예약을 잡았다.


바삐 지내는 사이 한 달이 훌쩍 지났고 어느덧 병원 가는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밤새 뒤척이다 이른 새벽 눈을 떴다. 어둑어둑한 방 안에서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긴장을 풀기 위해 아주 오랜만에 기도를 했다. 되도록이면 아무 일이 없길,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음이 크게 흔들리지 않길, 그리고 그 시간들을 잘 버텨낼 수 있기를 빌었다.




이러려고 1달을 기다렸나 자괴감이 들어

일찍 집을 나서 병원으로 향했다. 찬 바람을 뚫고 지하철에 몸을 실은 지 1시간 만에 병원에 도착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엄청난 인파가 나를 맞이했다. 접수와 수납, 번호표 뽑기와 대기의 절차를 거치는 동안 다시 1시간이 지났다. 대기자 명단에 오른 내 이름이 한 칸씩 당겨지는 것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불안을 느꼈다. 내 이름이 불려지고 진료실로 들어서기까지 계속 심장이 낮게 쿵쿵거렸다.


오랜 기다림과는 달리 진료는 허무하리만큼 짧았다. 의사는 외부에서 무엇이 직장을 누르고 있는지를 알아보려면 CT를 찍어봐야 한다며, 검사 결과에 따라 문제가 생긴 부위를 담당하는 과로 연계해 주겠다고 했다. 그 말은 1달 전 전화 예약할 때 이미 들었던 말인데.. 나는 토씨하나 빼놓지 않고 똑같은 그 말을 굳이 면전에서 다시 듣기 위해 이곳까지 와야했나 싶었다.


이대로 돌아가기엔 허무해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지만 바쁜 의사에겐 성가신 주절거림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답답한 마음으로 진료실을 빠져나온 나는 검사 날짜와 그 검사 결과를 들을 날짜를 잡기 위해 다시 30분에 걸쳐 접수와 수납, 번호표 뽑기와 대기의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오늘로부터 1달 뒤 다시 방문하라는 예약증 한 장을 받아 들고 병원 문을 나섰다.

이 많은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마음일까?
이 거지 같은 기분을 어찌해야하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 가지 감정이 마음 이곳저곳을 건드렸다. 박탈감, 허무함, 막막함, 혼자라는 느낌, 불안함, 서러움, 억울함. 그것은 20대에 셀 수 없이 많은 병원을 다니며 느꼈던 감정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병원을 올 때마다 느껴야 했던 그 복잡한 감정들은 오래전부터 나를 괴롭혀 왔던 것들이었다.


10년 전 그때, 삶이 고단해 얻게 된 정체 모를 병들이 나를 다시 힘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번 돈 늘 병원비로 다시 줄줄이 새어나갔다. 이렇다 할 원인을 알 수 없었고 뾰족한 해결책도 찾을 수 없었다. 절박한 마음으로 이 병원 저 병원에 도움을 구걸해 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의사의 냉랭하고 무미건조한 반응들 뿐이었다. 20대 내내 다닌 무수한 병원들은 내가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약자라 느껴지게 만들었다.


이젠 건강해졌다고 느낀 것도 잠시. 4년 전 사고로 인해 다시 지긋지긋하도록 병원을 드나들었고 징글징글할 만큼의 병원비를 지불해야 했다. 여러 번의 입원과 퇴원, 수십 번의 링거와 주사, 수백 알의 항생제와 진통제로 인해 나는 안 그래도 끔찍하게 싫어하는 병원을 더더욱이 질색하게 됐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니 내가 이토록 '병원'에 민감한 것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을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상황 가뜩이나 약한 나를 하게 만들었다. 혼자 기다리고, 혼자 고민하고, 혼자 입원하고, 혼자 버텨내 온 그 시간들'혼자라서' 더 버거다. 보호자를 찾는 직원의 물음에 '저는 보호자가 없습니다'라 답했다. 10년 전 그때도,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보호자가 없다고 말하는 내 모습을 보며 '나는 혼자'라는 생각에 가슴 시다.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이 걱정 많은 의사의 기우인지 아님 정말 내 몸에 무엇인가 자라고 있는 건지. 만일 진짜 뭔가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가벼운 물혹 따위인지 아님 무시무시한 종양인지 아직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사실 그것이 뭔지 알게 된다 할지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 나는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될 것이고 늘 그랬듯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따 수 밖에 없단 걸 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실체를 알기 전 그저 내 몸과 마음을 돌보야겠다고 마음 다지 것 뿐이다.


지금 내 장을 누르고 있는 것이 뭔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거지 같은 기분에 다시 짓눌리고 싶진 않다. 단지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무력한 약자가 된 듯 한 박탈감에 압도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지 생각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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