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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배우가 꿈입니다

상실과 애도 1-1.

어려서부터 흥이 많았다. 어른들은 내심 연필을 잡기 바랐건만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마이크를 덥석 집었다나 뭐라나. 유치원 재롱잔치를 시작으로 초등학교 시절 모든 장기자랑에 빠지지 않았지만 모두가 혀를 내두르는 신동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노래와 춤에 능통했다기 보단 사람들에게 관심받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골목대장 꼬맹이는 자라 예상밖의 내성적인 청소년이 되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이 아마 전생애를 통틀어 유일하게 조용했던 시기였지 않을까. 그 무렵 음악이나 무용 분야로 진로를 결정한 친구들을 볼 때면 내심 부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재능도 형편도 허락지 않는 나에게 예술인이 되는 것은 정말 꿈과 같은 일이었다.   




대학에 진학한 이후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전공이 심리학인지라 매주 해내는 과제들이 심리검사에 내면탐색이었던 탓이다. 그 무렵 적던 일기에는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건 뭘까?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거지? 나답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따위의 질문이 자주 등장했다.


친한 선배의 소개로 밴드 동아리에 가입했다. 이름마저 범상치 않은 '해방도깨비'. 꽤 긴 시간 동안 모범생의 탈을 쓰고 본색을 숨겨왔지만 도깨비는 얼마지 않아 나를 해방시켰다.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할 때마다 눌러왔던 욕구들이 강하게 꿈틀댔다. 그것은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그러나 오래도록 바라왔던 짜릿함이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뛰어가며 밤을 새워 공부하는 나도 좋았지만, 연습실에서 목이 쉬도록 노래하며 멋지게 공연을 해내는 내가 더 멋졌다.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나의 모습과 꿈꾸며 사는 삶의 간극은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나다움'에 대한 질문을 되뇌게 만들었다.



3학년이 끝날 무렵 큰 결정을 내렸다. 친구들이 본격적으로 취업준비와 고시공부를 시작하는 그때, 혼자 휴학을 결심했다. 그것은 지난 3년 최선을 다해 살아온 나에게 주는 보상이자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모님은 착실한 딸의 갑작스러운 경로이탈을 탐탁잖아하셨지만 나는 기어코 휴학을 강행했다. 당연하게 걸어왔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걸어 나가 보고 싶었다.


한 극단에서 아마추어 대학생 단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문을 보았다. 이게 바로 내가 찾던거다 싶어 한치의 망설임 없이 곧바로 지원했다. 생전 처음 오디션이라는 것을 봤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여자 주인공의 자리를 따냈다. 얼떨떨하면서도 못내 기뻤다. 오랜 시간 갈고닦아온(?) 딴따라의 끼가 드디어 빛을 발하는구나 싶었다.


생활은 학교를 다닐 때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아니 되려 더 빡빡해졌다. 아침 9시부터 6시까지는 카페에서 일하며 돈을 벌었고 퇴근 후 7시부터 밤 12시까지는 연습실에서 뒹굴었다. 끼니를 거르는 것이 일상이었고 기숙사에서 나와 단칸방을 얻었다. 생활비를 아끼려고 아는 언니와 동생을 룸메로 들여 셋이 함께 살기 시작했다.



매일 일과가 끝나면 퉁퉁 부은 다리에 땀에 쩌들은 상태로 막차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쓰러지듯 곯아떨어졌고 자는 내내 끙끙 앓을 만큼 몸이 고단했지만 마음만은 어느 때보다 충만했다. 그 무렵 누군가 건넨 편지 한 구절에는 '요즘의 너를 보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 특유의 빛이 뿜어져 나온다'고 적혀 있었다. 정말이지 그때의 나에게서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아우라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해의 봄과 여름은 찬란했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20명의 단원들과 함께 부대끼며 땀과 눈물을 쏟아부었다. 어느 누구 하나 계산이나 몸 사림 없이 모두가 순수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4번에 걸친 공연이 끝나고 거나한 뒤풀이를 끝으로 모두와 울고 짜며 이별했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48시간을 꼬박 깨어 잠들지 못했다. 그것은 생애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황홀감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얼마 뒤 연출과 감독님으로부터 한 가지 제안을 받았다. 지금까지 공연했던 멤버들을 모아서 새 극단을 꾸릴 거라고. 비전공자지만 연기가 하고픈 학생들을 찾아 키우는 곳으로 만들 거라고 했다. 3년 정도 극단에서 활동하다 보면 대학로에서 활동할 수도 있게 될 거라며 내게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겠냐 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어안이 벙벙한 것도 잠시, 이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쉬어가는 타이밍에 내가 원하는 시간을 살았고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부터 아예 다른 삶이 시작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설레면서도 두려웠다.


그날 이후 치열하게 고민했다. 식음을 전폐하지는 않았지만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생각하며 보냈다. 오래도록 도와준 은사님과 나를 잘 아는 이들을 찾아가 간절하게 조언을 구했다. 누군가는 안정을 누군가는 변화를 제안했지만 대화는 항상 '뭐가 됐든 나의 선택을 응원하겠노라'며 끝이 났다. 선택도 그에 대한 책임도 고스란히 나의 몫이었다.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들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가슴 뛰는 삶'이 혹여 '가슴 찢어지는 삶'으로 변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연기를 하는 것도 배우로 사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기에 선뜻 하겠다 할 수 없었다. 지금의 나는 미래의 나에게 떳떳할 수 있을까 물다. 꿈을 포기하고 삶에 안주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보았다는 나의 가능성과 잠재력보다는 스스로가 알고 있는 능력의 한계가 더 컸다.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제한적 생각과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안일한 만족감이 나에 대한 믿음을 줄이고 헛된 희망을 단념시켰다. 무엇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기 위해 그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감독님과 연출님께 거절의사를 밝히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곳에 모인 이들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던 자신감과 열정은 더이상 내게서 찾을 수 없었다. 내게 남은 것은 이젠 정말 끝이라는 씁쓸함과 공허 뿐이었다. 에 대한 미안함과 언젠가 후회하게 될까 하는 조바심이 뒤따라왔다.


모두가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데 나만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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