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애도 1-2.
오랜 시간 사귀던 연인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만나 군대까지 다 기다리며 6년이란 시간을 만나온 사람이었다. 우리는 사랑이라 부르기에도 조심스러울 만큼 순수하고 풋풋하게 만났다. 그것은 나의 첫사랑, 그러니까 생애 처음으로 해본 사랑이었다.
그는 부모로부터도 받아본 적 없는 사랑을 줬다. 그는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연인이었고, 나의 가족이자 전부였다. 그래서 그가 군에 입대를 했을 때 나는 전부를 잃은 느낌이었다. 훈련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보내고 돌아오는 길 위에서도 나는 그를 낳고 기른 부모님 앞에서 그들보다 더 서글피 울었다.
그를 보내고 돌아와 마주한 현실은 막막했다. 공허했고 고립감이 들었고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매일매일 날짜를 세어가며 그가 돌아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가 다시 돌아와서 그 빈자리를 채워주기를, 다시 이전처럼 나를 사랑해 주기를 기대했다.
애틋함과 간절함은 시간과 함께 옅어져 갔다. 점점 그의 전화를 기다리는 날이 줄어들었고 가끔은 이런저런 핑계로 통화를 미루기도 했다. 전역날이 가까워 올 수록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다투는 일이 잦아졌고 삐지거나 서먹한 채로 전화를 끊을 때가 많았다. '이게 아닌데, 자꾸 왜 이러지?'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가끔 그가 없는 삶을 상상하기도 했다.
생일이 발단이 되었다. 그가 전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였기에 나는 당연히 그와 함께하는 생일을 상상했다. 1년 중 가장 기다려지는 소중한 날, 세상 누구보다 그가 나의 존재를 축하하고 기뻐해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그날 나는 다시 또 혼자였다. 그날 나는 조용히 마음속 끈을 놓고 그와의 이별을 결심했다.
잃어버렸던 나의 전부가 돌아와 다시 나를 사랑해 주기를 기대했지만, 그는 돌아와 자기 자신과 미래를 향해 나아갔다. 그는 그 미래에 나와 함께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했지만 나는 현재 없는 미래를 그릴 수 없었다. 헤어짐을 고하고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 10번도 넘는 만남이 있었다. 울었다가, 빌었다가, 화도 냈다가, 설득도 했다가... 선물에 이벤트에 온갖 과정을 다 겪어내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울고 불며 지질하게 헤어졌다.
이별 후 호되게 아팠다. 처음 해본 사랑에 처음 해본 이별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마치 처음으로 사랑하던 그때처럼 이별 또한 모든 것이 서툴고 어설펐다. 친구들을 불러 진탕 술도 마셔보고, 눈이 퉁퉁부어 뜨지 못할 만큼 목놓아 울어도 보고, '다시 연락해 볼까? 정말 이대로 헤어지는 건가?' 따위 생각과 감정에 잠 못 이루기도 했다. 그렇게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담아 적은 부치지 못한 편지가 작은 상자 하나를 가득 채웠다.
가만히 마음을 돌이켜봤다. 나는 왜 그와 헤어지려 했을까.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하면 될 텐데 왜 굳이 이렇게까지 아파하면서 이별을 택한 건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그에게 나를 사랑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 나의 마음을 도려내어가면서 나에게서 그를 떼어냈다. 이별을 고한 것은 나였지만 나의 마음에서 더 많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와 헤어지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비로소 마음속 진실의 문이 열렸다. 내가 그와 헤어진 진짜 이유는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받아본 적 없는 이가 느끼는 '사랑받을 자격에 대한 의심'과 '이해받지 못할 것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와 사귀는 6년 동안 나 자신도 모르게 그와 나를 계속 비교해 왔다. 인품 좋으신 부모님, 화목한 가정의 분위기, 부유한 경제적 상황과 안정된 생활환경. 부족함 없이 아쉬움이 뭔지 모르고 살아가는 그는 나에게 딴 세상 사람처럼 느껴졌다. 상처투성이에 서로를 향한 원망으로 점철된 나의 가족, 결핍과 부족 가운데서 겨우겨우 살아가는 나의 모습은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였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이유를 알 수 없는 여유와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그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이들, 흔히 말해 그의 든든한 뒷배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나는 언제나 이유를 알 수 없는 조급함과 불안에 시달렸다. 멈춰 서서도 무너져서도 안 된다는 강박감이 나를 계속해서 채찍질했다. 그는 늘 잘 될 거다라며 쉽게 희망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늘 안 되면 어떻게 할지부터 생각했다.
나는 분명 주어진 삶을 부끄럼 없이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 그의 곁에 있으면 나 자신이 자꾸만 초라해 보이고 위축되었다. 그것은 연인에게서는 느끼고 싶지 않은 일종의 박탈감이었다. 그처럼 마음이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은 나같이 쉽게 아프고 불행한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는 절대로, 평생토록 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전역 후 함께하자며 세워두었던 모든 계획들은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었다. 함께 떠나기로 했던 여행도, 만나기로 했던 사람들도 이제 서로에게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 되어버렸다. 나의 휴학과 새로운 도전을 누구보다 응원해 주었던 그였지만 정작 새로운 삶 속에 그는 없었다. 그는 떠났고 나만 남았다.
2년 전 그때처럼 혼자가 되었지만 그때만큼 공허하지는 않았다. 그는 더 이상 나의 전부가 아니었기에 그의 빈자리는 그때만큼 크지 않았다. 내 삶에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도,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것도 이제는 그가 아니라 나 하나뿐이었다. 지금부터는 그에게 배운 사랑을 스스로에게 주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