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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반도주 기차여행

상실과 애도 1-3.

휴학을 결심하던 당시 뮤지컬팀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목표가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것은 인생에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가보는 것이었다. 수많은 나라들 중 고심해서 고른 목적지는 터키였다. 유럽과 아랍의 문화, 맛있는 요리 그리고 대자연까지. 첫 해외여행지로 쉽지 않은 곳이었지만 가장 관심이 가는 곳이었다.


가이드북을 사서 모서리가 반질반질해질 때까지 꼼꼼하게 읽으며 공부했다. 처음으로 여권을 발급받고 직접 항공권을 발권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하나씩 준비해 나가던 중이었다. 공연이라는 하나의 큰 과업이 끝나고 6년 간의 관계를 정리하고 나니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어느덧 출국이 2주 앞으로 다가왔다.




곧 떠나야 할 여행을 앞에 두고 새삼스레 고민에 빠졌다. 나는 왜, 무엇을 위해, 이 여행을 가려고 했던 걸까? 처음에 품었던 가슴속 두근거림은 사라지고 머릿속에 커다란 물음표가 떠올랐다. 해외는커녕 혼자서 국내여행 한번 가본 적 없는 내가 과연 머나먼 이국에서 무사히 여행할 수 있을까?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며칠을 고민했다. 갈까 말까, 간다면 무엇을 위해 가는 걸까. 남들 다가는 해외여행을 해보기 위해서라면 지금 꼭 떠나야 할 이유는 없었다. 휴학 후 성취해야 할 또 하나의 목표라 생각하니 갑자기 여행이라는 꿈이 짐처럼 느껴졌다. 스스로에게 거듭 물었다. 정말 이 여행을 가고 싶은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러자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곳에서의 강렬한 자극이 아닌 지난 몇 달간 폭풍처럼 몰아친 감정과 경험을 소화시킬 고요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항공권을 취소했다. 아쉬움보단 홀가분한 마음이 컸다. 멈춰 서기 위한 포기와 단념은 나아가기 위해 도전하는 것만큼이나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 그것은 지난 1년 간 많은 것을 내려놓으며 깨달은 사실이었다.



한동안 죽은 듯이 잠만 잤다. 함께 살던 언니와 동생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다니던 나의 칩거를 걱정했다. 기운 없이 축 쳐진 채 시름에 잠긴 내 모습이 낯설었으리라. 오랜만에 집을 나와 극단에서 함께 지내던 동료를 만났다. 당연히 떠났을 거라 생각했던 여행취소 소식에 걱정이 되어 찾아왔다고 했다. 그는 지난 1년 나의 모든 고뇌와 시행착오를 곁에서 생생히 지켜보아온 이였다.


그와 대화하며 솔직한 마음을 꺼내놓았다. 무언가를 준비할 기운도, 어디론가 떠날 자신도 없어서 가만히 있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없이 나를 지켜보던 그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자기가 책임지고 데려가 줄 테니 함께 여행을 해보자고. 언제? 어디로? 얼마나? 어떻게? 의아한 표정으로 질문을 쏟아내는 나에게 그는 지금, 어디든, 내키는 만큼 일단 가보자고 했다.


전국 어디든 갈 수 있고 원할 때 언제든 내릴 수 있는 기차를 타기로 했다.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 근처 가게에 들러 배낭을 샀다. 자취방에 들러 세면도구와 옷 몇 가지를 챙겨 넣고 무작정 밤기차에 올랐다. 마치 야반도주라도 하듯 목적지도 기간도 정해지지 않은 갑작스러운 기차여행이 그렇게 시작됐다.


기차에 몸을 싣고 처음 도착한 곳은 순천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흐린 날씨였지만 탁 트인 순천만이 보고 싶었다. 입구에 도착한 뒤 나무데크를 따라 말없이 걸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토독토독 우비를 때리는 빗방울 소리와 개구리울음소리뿐이었다. 그 길 끝에서 순간이동을 한 듯 현실감 없는 늪지의 풍경이 펼쳐졌다.


다시 기차를 타고 달려 늦은 저녁녘 전주에 도착했다. 비 개인 한옥마을을 걷다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어느 골목으로 들어갔다. 한 남자분이 '느리게 가는 우체통' 옆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계셨다. 편지를 써서 그곳에 넣으면 1년 뒤 같은 날에 편지를 보내준다고 했다. 우리는 종이가게에 들러 한지로 만든 편지지를 사서 근처 한옥카페로 갔다.  


그곳에 앉아 엄마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이런 시간을 보냈고 이런 일들을 겪었으며 지금은 이곳에 있다고. 편지가 끝나갈 때 즘 깨달았다. 태어나서 제대로 된 여행이라는 걸 해본 것도, 엄마에게 편지를 쓰며 울지 않은 것도 그날이 처음이라는 걸. 생각지 못한 뜻밖에 여행을 시작한 그날, 나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여행을 포기하고 얼마 후 물끄럼히 바라본 달력 속에는 이미 떠났어야 할 출국날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또 하나의 동그라미가 눈에 들어왔다. 그날은 15년 만에 처음으로 알게 된 엄마의 기일이었다. 엄마의 기일을 알게 된 뒤로 계속 생각했다. 과연 엄마를 위해 무얼 할 수 있을까 하고. 언제인지 몰라 마음껏 슬퍼하지도 그리워하지도 못했던 지난날들이 미안했다.


그날 그곳에서 편지를 쓰면서 답을 얻었다. 앞으로 다가올 엄마의 기일마다 그녀와 함께 여행을 해야겠다고. 발길이 닿는 대로 돌아다니면서 엄마 생각을 실컷 하고,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하면 그곳에 앉아 엄마에게 편지를 쓰며, 여행하며 찍은 예쁜 사진을 편지와 함께 봉투에 담는 그런 여행을 말이다.


살아생전 고생만 하느라 여행 한번 못해봤을 엄마가 안쓰러웠다. 38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하늘나라로 간 엄마를 대신해 내 눈으로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아 보여주고 싶었다. '앞으로 당신의 기일마다 함께 여행을 떠나겠다'라고 적은 편지를 우체통에 넣었다. 혹여 내가 잊더라도 다음 기일에 도착할 편지가 나에게 약속을 일깨워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일주일 가까이 여행하며 많은 것을 해보았다. 창밖 풍경에 이끌려 기차에서 황급히 내리기도 하고, 유명한 곳이 있다면 무작정 찾아가보기도 했다. 날이 더우면 분수에 뛰어들어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보기도, 문이 닫힌 수목원에 잠입해 아무도 없는 숲 속길을 걷기도 했다. 늘 목표를 정해놓고 짜여진 계획표대로 살아왔던 나에겐 모든 것이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아이처럼 천진하게 즐거워하다가도 한 번씩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비겁하게 포기해 버린 나의 꿈과 6년을 함께한 사람의 잔상이 떠오를 때마다 과연 옳은 선택을 한 것인가 하는 불안감이 찾아왔다. 이젠 다시 돌이킬 수 없었건만 나의 마음은 시도 때도 없이 과거로 돌아가 계속해서 그때를 되뇌고 있었다. 몸은 이곳에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과거에 묶여 그곳을 서성이는 듯했다.


여행의 끝무렵, 함께 간 동료가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책에는 애도의 과정으로서 여행에 관해 적혀 있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책을 덮으며 알게 되었다. 나는 올 한해 무수한 것들과 이별하며 상실을 경험했고, 그런 나에게 필요한 것이 애도의 시간이었다는 걸. 이 여행은 내게 단순한 여행이 아닌 상실의 슬픔을 넘어서기 위한 애도의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상실의 현장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행위는 도피지만 그것은 진전된 애도방식이기도 하다. 그것은 상실한 대상에게로 향하던 마음이 방향을 바꾸어 다른 곳으로 향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멀리 떠나면 마음을 새로운 환경에서 사용할 수 있고 나아가 새로운 시작을 위해 투자할 수도 있다.

애도의 마지막 단계는 상실한 대상을 마음에서 떠나보내는 일이다. 상실에 매몰되지 않고 잃어버린 대상과 그 대상과 함께한 나 자신까지도 떠나보내야만 한다. 과거의 대상과 나 자신을 보내는 것은 애도의 작업인 동시에 변화와 성장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미래로부터 온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 <좋은 이별> 김형경 -


생애 첫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여행하기 전과 달라져 있었다. 오랜 꿈을 포기한 자리에 새로운 꿈을 채워 넣기로 마음먹었고, 오랜 사랑을 떠나보낸 자리에 새로운 사랑을 맞이해 보기로 했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엄마를 다시 내 삶에 초대하면서 그녀가 떠난 기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됐다. 모든 것은 이번 여행이 나에게 선물한 것들이었다.  


떠나보내는 일은 새로운 것들을 맞이할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다. 상실한 대상을 보내고 그 대상과 함께했던 과거의 나까지 떠나보내고 나니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내가 나타났다. 꿈이든 사랑이든 사람이든. 그 여행 이후 소중한 무언가를 상실한 이에게 나는 조심스레 여행을 권하게 됐다. 마치 그때의 동료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언제든 어디가 되었든 여행의 목적지와 수단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잃어버린 것들을 충분히 생각하고 슬퍼하며 그것을 떠나보낼 만큼의 시간과 공간이 있는 곳이면 충분하다. 꼭 여행이 아니어도 좋다. 잃어버린 것들에 메여있던 마음을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으면 된다. 그저 당신이 슬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시도해봤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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