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그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하는 일마다 안 되고, 길목마다 막히고, 과정마다 꼬여서 '혹시 내가 지금 몰카 당하는 중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던 적 말이다. 나 또한 지금껏 살면서 '세상살이가 참 쉽지 않다'고 느낀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오늘은 그중에서도 '세상이 나한테 이럴 수는 없는 거라'며 통탄이 절로 나도록버거웠던 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때는 바야흐로 20대 후반,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진학했던 대학원에서 석사 졸업 논문을 쓰고 있던 중이었다. 간단한 리뷰논문만으로도 졸업이 되는 여타의 대학원과는 달리 내가 다니던 곳에서는 꽤나 높은 수준의 연구결과를 요구했다. 그곳은 대학원 설립이래 20년 동안 박사 졸업생 0명에 석사졸업조차 호락하지 않기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입학 한 지 2년 반, 생명줄을 줄여가며 가방끈을 늘려가던 나는 한 학기 내내 준비하던 논문주제를 또다시 거절당했다. 몇 날 며칠 밤을 새워가며 준비한 발표는 대안 없는 비난으로 점철되었고, 그간의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몸도 마음도 탈탈 털린 상태로 연구실을 나서면서 '이 정도면 연구자로서 역량부족이다'는 생각과 더불어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에 사로잡혔다.
한 달 내로 방 빼세요
1년 넘게 살고 있던 자취방에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찾아와 주인이 바뀌었다고 했다. 계약서 상의 계약기간은 만료되었지만 주인과 합의하여 묵시적 갱신을 하던 중인 나에게 그는 1달의 말미를 줄 테니 집을 비우라 했다. 아무런 예고 없이 이러는 법이 어디 있냐 따져 물었지만 그는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딱 잡아뗐다.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월세를 10만 원 올려서 새주인과 재계약을 하거나 짐을 싸서 나가는 것뿐. 일개 대학원생이었던 나에게는 그만큼의 월세를 올려줄 돈도, 당장에 짐을 옮길 공간도 없었다. 급한 대로 이곳저곳 집을 알아보러 다녔지만 학기가 한창인 때에 한 달 안으로 살 집을 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밤낮으로 발품을 팔며 원룸촌을 돌아다니던 어느 날, 갑자기 설움이 북받쳐 오른 나는 길을 걷다 멈춰 서서 그자리에 주저 앉았다.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기 위해 손등으로 눈두덩이를 훔치며 마치 엄마 잃은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쑥덕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도움을 구할 데도 억울함을 호소할 곳도 없었던 나는 그저 막막하고 두려운 마음 뿐이었다.
이제 우리 그만하자
가난한 대학생 시절 6년을 함께한 연인이 있었다. 우린 젊다 못해 어렸기에 얼굴만 보고있어도 웃음이 났고 돈이 없어도 그저 행복했다. 서로의 형편과 상황을 알았기에 빠듯한 주머니 사정에도 서로를 도와가며 살았다. 교생실습을 가는 나를 위해 그는 정장을 사주었고 취업준비를 하는 그를 위해 나는 영어학원비를 보태었다. 우리는 생에 가장 초라한 때를 함께하며 서로의 보잘것없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했다.
가난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사랑이 문밖으로 도망간다고 했던가.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거라 희망하며 서로를 다독이던 우리는 삶이 주는 무게에 눌려 점점 지쳐갔다. 그는 계속되는 취업실패로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공장에 들어갔고 나는 논문이 엎어지면서 내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휴학에 들어갔다. 졸업 후 취직이 간절했던 우리에게 날아온 퇴짜는 마치 세상으로부터의 거절 같았다.
좌절 앞에서 언제나처럼 애써 괜찮다고 서로를 위로했지만 각자가 힘든 상태에서 함께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상대방이 팔다리가 잘려 피투성이가 된 채로 흙바닥을 뒤구르고 있는데, 나 또한 양팔이 잘려 그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나의 고통을 감내하며 그의 아픔까지 감당하기 버거웠던 나는 '이제 그만하자'며 그를 밀어냈다. 그의 고통에서부터라도 벗어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등을 돌렸다.
고인의 명목을 빕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쭈욱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노인성 치매와 신경증적 성격장애를 겪고 있던 그녀는 함께 하는 주변인들을 괴롭게 했다. 엄마를 괴롭히고 고생시킨 장본인이었지만 우리 가족 모두 평생 그녀의 경제적 지원에 기대어 살아왔기에 그녀는 내게 양가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나이가 들어 노쇠해진 그녀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경제력이 사라진 그녀와 어느 누구도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주 외롭다며 나를 찾았고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를 종종 찾아갔다. 함께 밥을 먹고 목욕을 시켜주는 것이 해줄 수 있는 전부였지만 그렇게라도 지금껏 우리 가족을 돌봐준 은혜를 대신 갚고 싶었다.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여느 때와는 달리 힘없는 목소리로 배가 많이 아프다고 했다. 나는 같이 병원에 가보자며 주말에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다. 통화의 끝에 그녀는 '고맙다 덕규야.. 정말 고마워' 라 말했다. 당시 나는 영문을 알지 못했지만 어쩌면 그녀는 스스로 예감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그녀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어차피 힘든 거 앞으로도 좀 더 힘들게 살아
며칠 간의 장례가 끝나고 아직 이별의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았건만 세상은 차갑고 현실은 가혹했다. 나는 정작 일말의 기대도 아무런 생각도 없었지만 가족이란 이름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라고 미리 엄포를 놓았다. 세상을 떠나며 그녀가 남겨놓고 간 얼마의 유산에는 이미 정해진 주인이 있는 듯했다.
힘들다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그들은 나의 힘듦을 지레 짐작했다. 그리고 '기왕지사 지금까지 힘들게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조금만 더 힘들게 살아라'는 신박한 논리로 내게 계속 힘들게 살 것을 권했다. 당장 몸 뉘일 방 한 칸이 절실했고 장기라도 뜯어다 팔아야 하나 싶을 만큼 돈이 없었지만 유산을 두고 눈알을 번들대는 그들 앞에서 감히 힘들다거나 도와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혼자 자취방으로 돌아와 불 꺼진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다. 원래도 항상 혼자였지만 그날따라 혼자라는 생각이 사무치게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이 정도로 모든 일이 한꺼번에 몰아칠 수 있는 걸까? 신이 있다면 그는 분명 나를 죽도록 미워하는 걸 거라고, 이건 온 세상이 나를 억지로 까내리려고 작정하고 악을 쓰는 중이라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