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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섬에 나타난 미친 여자

2-2. 고독과 자기 수용

가족, 연인, 학위, 집. 삶에서 소중히 여겨왔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뒤 스스로를 골방에 가두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루 두 세탕씩 뛰어오던 알바도, 매일같이 나를 숨 막히게 옭아매던 논문도 싸그리 그만뒀다. 잘 해내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며 버텨오던 모든 것들을 놓고 나니 조금은 홀가분한 맘이었다.


탁한 눈빛으로 정신을 반쯤 빼놓고 있는 내 모습 몇몇이 상담을 권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위태로워 보이니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해보라고. 그러나 내게는 누군가를 찾아가 구구절절 내 상황을 말할 힘도 의욕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도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거란 회의감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급하게 집을 구하고 이사를 했지만 나의 색이 깃들지 않은 공간은 낯설었다. 사정을 아는 여럿이 안부를 물어왔지만 이렇다 저렇다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자취방 문을 걸어 잠그고 폰번호를 바꿔버렸다. 그냥 쉬고 싶었고, 혼자 있고 싶었고, 가만히 머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력감에 잠식된 채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자다 깨기만 반복했다. 가끔씩 눈을 뜰 때마다 온전한 어둠과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 소리만이 작은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이불이 머금은 온기를 느끼며 다시 몇 번이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죽은 듯 살아있기를 며칠, 창 밖으로 희미한 햇살이 비춰 들었다. 문득 이곳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스스한 상태로 몸을 일으킨 뒤 무언가에 홀린 듯 주섬주섬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목적도 기약도 없는 갑작스런 여행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으로 나가는 길, 하나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치유의 섬, 제주> 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으로 와본 것이 전부인 이곳이 어쩌다 치유의 섬이 되었는지 의문스러웠다. 마음 한켠으로 시니컬한 조소가 올라왔다. '니가 치유의 섬이면 어디 나도 한번 치유해 보든가' 하고.


버스를 타고 공항 근처 숙소에 도착했다. 자취방과 다를 바 없이 낯선 그곳이 되려 집보다 편하게 느껴졌다. 아무 생각 없이 도망치듯 떠나온 이곳에서 당장 내일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 멍하게 앉아있던 내 눈앞에 낡은 팸플릿 한 장을 들어왔다. 그곳에는 섬을 일주하는 해안도로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다음날 아침 근처 렌탈샵에 들러 3년 간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면허증을 내밀었다. 제 발 저린 도둑마냥 쭈뼜대는 나를 본 직원이 다 안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기본적인 작동법을 알려주었다. 100m 남짓 가게 앞 도로를 몇 바퀴 돌아본 뒤 키를 건네받았다. 운전석에 앉았지만 선뜻 출발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쌩쌩 달리는 차들 사이, 나를 태운 스쿠터가 30km의 속도로 아슬아슬하게 굴러갔다. 보다 못한 택시 한 대가 가까이 다가와 '느리게 가면 더 위험하니 속도를 올리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두려웠지만 눈을 꼭 감고 손잡이를 힘껏 돌렸다. 비틀대던 두 바퀴가 힘을 받아 앞으로 치고 나갔다.



바다와 숲과 들판을 지나

처음 도착한 곳은 한 해변이었다. 여름 내 북적대던 이들이 빠져나간 바다는 한적하다 못해 쓸쓸했다. 아직은 따뜻한 바닷물이 찰랑대는 해변에 앉아 한참이나 넋을 놓고 수평선을 바라봤다. 눈이 부셔서인지 마음이 시려서인지 이유 없이 눈이 시큰거렸다. 잿빛으로 꾸물대는 내 마음과는 달리 바다는 연하늘빛으로 맑게 반짝였다.


매일 눈을 뜨면 스쿠터를 몰고 마음이 가는 대로 달렸다. 풀내음이 맡고플 땐 숲으로, 초록빛이 보고프면 오름으로. 펼쳐진 풍경을 눈에 담으며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볕을 받은 피부가 그을어 갈수록 운전에도 점차 익숙해졌다. 지나가다 눈에 보이는 식당 들어가 대충 끼니를 때우고 하루의 끝무렵 가까운 숙소에 몸을 뉘었다. 오늘이 몇일인지 이곳은 어디인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들이 둔해졌다.


생각과 감정들은 선명해졌다. 그간 소화시키지 못했던 일들이 조금씩 받아들여질 때마다 감정이 묵직하게 올라왔다. 눈물이 터져서 울기도 하고, 화가 치밀어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만약 누군가 곁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분명 나를 미친 여자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책망과 자책 사이

터져 나오는 감정들은 지금껏 경험해 본 것들과 달랐다. 훨씬 농도가 짙고 깊고 눅진했다. 그간 억눌러 왔던 오만가지 어두운 기억들이 끝도 없이 밀려왔다. 한번 울음이 터지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가슴을 치고 몸을 떨며 숨도 쉬지 못하고 울었다. 이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괜찮아질 수 있을까. 답은 쉬이 보이지 않았고 그저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무도 지금 내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대로 연락을 끊고 누구도 찾지 못하게 사라져 버리면 어떨까? 몇 안 되는 짐을 정리하고 팔 것들을 다 팔아치운 뒤 어딘가로 떠나버리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도록 다리를 불태우고 머나먼 곳으로 강을 건너고 싶다는 무모한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조용히 사라지기보단 모두가 알 수 있도록 나를 끔찍하게 파괴시키고도 싶었다. 나에게 고통을 준 모든 이들에게 죄책감과 후회를 안겨주고픈, 일종의 뒤틀린 복수심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나를 망가뜨리고 내 삶을 파괴하는 것이 어느 누구에게도 복수가 될 수 없단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뾰족한 화살은 돌고 돌아 결국 나를 향했다. 왜 남들은 잘만 끝내는 대학원을 몇 년째 질질 끌고 있는 건지, 많이 사랑하면서 그와 왜 헤어지는 건지, 왜 나쁜 집주인에게 좀 더 뭐라 하지 못했는지, 그렇게 힘들면서 왜 도와달라 말하지 않았는지, 왜 좀 더 일찍 할머니에게 찾아가지 않았는지. 하나하나 돌이켜 보면 볼수록 후회만 가득했다. 나는 나를 힘들게 한 이들 대신 나를 표적 삼아서 가슴을 후벼 파고 못살게 괴롭혔다.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길다

종일 온갖 생각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날이 저물어 숙소에 도착하면 눌러왔던 피로가 몰려왔다. 따뜻한 물로 종일 쌓인 먼지를 씻어내며 마음도 노곤히 풀어냈다. 잠들기 전 침대에 엎드려 그날의 상념을 끄적였다. 그렇게 한참 토해내듯 글을 써내려 가다 보면 머릿속 뒤죽박죽으로 엉겨있던 하루치 생각과 감정들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는 듯했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불 꺼진 숙소는 낯설만치 고요했다. 세상에 나만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마다 간간이 들리는 잠든 이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말 한마디 섞어 본 적 없는 이름 모를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이 기나긴 밤에 누군가와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었다. 누군가에겐 고단하고 길었을 낮일 테지만 나에겐 모든 밤이 그 어떤 낮보다 길었다.


이제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게 느껴졌다. 돌아가면 마주해야 할 무수한 현실들을 혼자서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할 수만 있다면 돌아가지 않고 이 여행을 영원히 지속하고 싶었다. 그렇게 여행은 몇일에서 2주로, 다시 또 한 달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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