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고독과 자기 수용
" 혼자 오셨어요? 저희 같이 모여서 한 잔 할 건데 같이 하실래요?"
숙소 거실에 앉아 노트를 끄적이고 있는데 같은 숙소에 묵고 있던 이들 중 하나가 말을 건네왔다. 여행 온 사람들끼리 술이나 한 잔 하면서 밤새 이야기나 나누자고 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활짝 웃으며 애진즉에 그 무리를 따라나섰을지도 모른다. 내 이야기를 안주거리 삼아 꺼내어 놓는 것은 물론 상담자 노릇을 자처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 애를 썼을 터였다.
그때의 나는 누군가와 말을 섞고 싶지도 낯선 이들에게 나를 드러내고 싶지도 않았다. 억지웃음을 지어가며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을 던지고 마음이 담기지 않은 맞장구를 치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피곤한 일이었다. 나는 적당히 둘러대며 거절 한 뒤 다시 글을 쓰는 것에 몰입했다. 마음 한켠에선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스스로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요구를 들어주었을 때 올라오는 뭉근한 만족감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산해진미가 지천에 널린 제주도에서도 나의 주식은 김밥과 샌드위치였다.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부터 밥은 그저 허기를 채우고 하루를 연명하기 위해 때우는 끼니일 뿐, 어디로 가서 무엇을 먹을 것인지 고민하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건 이미 오래 베인 익숙한 습관 같은 거였다.
여행을 지속하면서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눈이 띠용하고 뜨일 만큼 맛난 음식을 먹는 일이 생겼다. 몇 번의 근사한 식사를 경험하면서 나는 밥을 먹기 전에 근처에 맛있는 식당이 있는지, 오늘은 무얼 먹고 싶은지 생각하게 됐다. 기왕이면 내가 좋아하고 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음식을 먹어야겠다 생각한 것은 처음이었다.
익숙한 나와 익숙하지 않은 나
시장에 들러 이런저런 물건들을 구경했다. 다들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려는지 양손이 넘치도록 제주 특산품을 사고 있었다. '제주에서 온 선물을 받으면 다들 좋아하겠지?' 그들의 장바구니를 기웃거리던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몇몇의 얼굴을 그리며 초콜릿 몇 박스와 근사한 제주풍경이 담긴 엽서를 샀다.
숙소 구석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밤이 늦도록 엽서를 썼다. 제주발 우편도장이 찍힌 편지를 받고 좋아할 사람들이 떠올랐다. 피곤한 나 자신을 돌보지 않는 내가 야속했지만 나는 눈을 부비면서도 기어코 수십 개의 선물을 포장했다. 타인들로부터 받은 인정과 사랑으로 나의 가치를 확인하려는 익숙한 마음이 다시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다음 날 이중섭 거리를 걷다 한 공방에 들어갔다. 많은 은공예품들 사이로 액세서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민들레를 닮은 작은 풀꽃 모양의 귀걸이 한 쌍과 목걸이. 퍽 마음에 들었지만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한참을 만지작대며 머뭇거렸다. 문득 어젯밤 남들을 위해 지극 정성을 쏟아 준비했던 선물이 떠올랐다. 고생한 나에게도 이 정도 선물쯤은 해줘야겠다는 작은 결심이 섰다.
결국은 돌아가야 할 곳
어느 숙소에서 집에 관한 글 한편을 읽었다. '집은 나를 보호해 주고 본성을 지켜준다. 나는 밖에 나가면 한낱 초라하고 연약한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억울함을 당하거나 무안을 느끼고 의기소침해지면 집은 그 모든 걸 다독이고 풀어준다. 누구나 밖에서 속상한 일이 있으면 집으로 가고 싶다. 집은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스스로 이겨내고 해결방법을 찾아내길 기다려준다.'
한 단락 남짓하는 구절을 읽는 동안 눈물이 뚝뚝 흘렀다. 많은 이들에게 위안을 주는 '집'이라는 공간을 나는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난 20년 간 집은 내게 언제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정확하게는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다. 그리고 20살 이후 독립하여 살아온 공간들 또한 내게 완전한 집이 되어주진 못했다.
그러나 지금껏 내가 집이라 불러온 공간은 비록 대단히 좋거나 행복이 넘쳐나는 곳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내가 힘들 때 도망치고 싶은 안식처이자 무언가로부터 숨어있을 수 있는 은둔처가 되어주었다. 어쩌면 그곳을 잃었을 때 내가 느꼈던 불안과 설움은 단순히 갈 곳이 없어진 것 이상의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문득 마음속 한 귀퉁이에서 집이라는 존재가 고개를 내밀었다. 숙소가 아닌 나의 집, 익숙한 나의 것들로 채워진 그곳. 그저 도망쳐 나오고 싶었던 그곳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글을 읽을수록 자꾸만 내 냄새가 배어있는 이불이, 좋아하는 물건들로 가득한 책상이, 나에게 안도감과 편안함을 주었던 내 방이 그리워졌다. 그날 나는 누군가가 적어둔 글귀 한 구절 덕분에 모른 척 미뤄오던 돌아가는 비행 편을 예약했다.
여행은 본디 처음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귀환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기에 떠나는 길과 돌아오는 길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방랑자는 돌아갈 곳이 없거나 돌아갈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여행이 아니라 정처 없는 방랑을 한다.
여행자들은 홀로 떠난 여행 중에도 별로 외로워하지 않는다. 누군가와 심리적으로 연결돼 있으며 언제라도 여행을 끝내고 자신을 환영해 주는 누군가에게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고독의 시간을 즐긴다. 반면 방랑자들은 누군가와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 없으며, 여행이 끝나도 자신을 진심으로 환영해 줄 그 누군가 혹은 그 어딘가가 없다. 당연히 방랑자는 여행 중에도 종종 외로움의 고통에 시달린다.
나는 지난 여행을 통해 고독과 외로움의 확연한 차이를 알게 되었다. 물론 둘 다 홀로 있는 것이지만 '고독(solitude)'이 스스로 관계에서 물러나 자신을 벗 삼고 있는 시간이라면 '외로움(loneliness)'은 다른 사람과 단절되고 자신도 의지가 되지 않는 공허의 시간이다. 여행은 자신과 함께하는 고독의 시간이다.
-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
여행을 떠나기 전의 나는 외로웠다. 모든 사람과의 연결이 끊어진 채 세상에 혼자 남겨진 고립감에 몸부림쳤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오기 전의 나는 기꺼이 고독할 수 있게 됐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거리를 두더라도 그만큼의 공간을 나에게 허락해 주면 혼자라 할지라도 외롭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돌아가지 않기 위해 여행의 끝을 유예해 왔던 나는 방랑자였다.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으려 애쓰면서 혼자임을 감당하지 못해 외로워하는 모습조차도. 그러나 여행을 지속하면서 조금씩 하나의 존재와 연결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인생여행이 끝날 때까지 언제까지나 함께 걸어가야 할 '유일한 동행인 나'였다.
관계의 단절 혹은 삶에서의 큰 좌절을 경험하는 이들에게 나는 혼자만의 여행을 권한다. 그것은 그 어떠한 존재가 아닌 오직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다시 일어날 힘을 얻으리라는 확신에서 비롯한 것이다. 혹여 세상과 사람이 싫어졌다면 진정으로 혼자가 되어보라. 당신은 언제나 혼자가 아니었음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