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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길을 잃는 것도 좋다

가볍게 쓰고 싶어 적는 글 1

때는 바야흐로 퇴근 직후인 6:30. 2분 뒤에 버스가 도착한다기에 퇴근 도장을 찍자마자 미친 듯이 내달렸지만 바로 코앞에서 버스를 놓쳤다. 집으로 가는 다음 버스는 30분 뒤에 있었기에(젠장ㅠ) 다리에 힘이 풀려 정류장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축 처진 어깨로 한참을 앉아있다 지도 어플을 켜서 다른 길을 찾아보니 10분 뒤 도착하는 또 다른 버스 번호가 찍혔다. '오호라~ 오늘은 요걸 타볼까나?'라며 웃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그 버스가 나타났다. '와~ 대박ㅋㅋㅋ 역시 난 러키 걸~!'이라며 냅다 버스에 올라탔고, 신나는 마음에 기사님께 똥꼬 발랄한 인사까지 건넸다.



창가에 앉아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낯선 풍경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신랑에게 카톡을 보내고 싶어졌다. 오늘 새로운 번호의 버스를 탔다고, 처음으로 가보는 길이라 괜히 설레고 좋다고. 그리고 아련한 감성에 젖어 들어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찰칵찰칵 찍어 보냈다.


그 뒤로 30여분 남짓 달렸을 즈음 신랑에게서 답장이 왔다. '풍경 이쁘네. 근데.. 지금 바다가 보이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응....?' 아련한 표정으로 창밖을 감상하다 무심결에 톡을 읽던 나는 '아.... 우리 집은 내륙에 있구나.. 근데 나는 지금 바다로 향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반대쪽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는 걸.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자마자 황급히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 바닷가 마을 시골 버스정류소에 도착해있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부랴부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네가 하루라도 시트콤을 안 찍으면 섭섭하지'라며 차를 끌고 나를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창 밖으로 보였던 아름다운 풍경


길을 잃었다 (뚠뚠~ 뚠뚠~ 아이유 노래가 떠오르는 건 나뿐인가)

쉬고 있을 남편을 이 머나먼 곳까지 오게 하는 것이 미안해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려고 버스를 타고 왔던 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인도도 없고 인적도 드문 생짜배기 도로였지만 옆으로 보이는 바다와 불그스름한 노을, 하늘에 떠있는 보름달이 있어서 생각보다 외롭지 않았다.


지난 2년 간 늘 독서실과 병원, 혹은 직장과 집만 왔다 갔다 하는 단조로운 일상을 반복했다. 환자 혹은 수험생이라는 굴레를 매는 동안 어느 하루도 마음 편히 쉬거나 가까운 곳에 조차 놀러 가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생활 반경 10km 이내를 벗어나지 못하던 내가 외딴곳에 혼자 놓여있는 기분이 무척 낯설지만 설레었다.


마치 배낭을 메고 혼자 세계여행을 다니던 그때가 된 것 같았다. 길을 잃고, 차를 놓치고, 낯선 곳에 도착하고, 지도를 보고 걸어가는 그 시간들이 너무나도 익숙했고, 너무나도 그리웠다는 걸 알게 됐다. 길을 걷다 멈춰 서서 이리저리 사진을 찍었다. 아주 오랜만에 음식과 고양이가 아닌 다른 것이 카메라 앨범에 담겼다.


이정도 풍경과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인적이 드문 시골길, 어느 삼거리 모퉁이에 쭈그려 앉아 모기를 쫓아가며 남편이 오길 기다렸다. 장장 30분의 표류와 30분의 기다림 끝에 남편과 극적으로 상봉을 했다. 눈꼬리와 입꼬리를 한껏 내려뜨리고 턱에 있는 대로 주름을 지어가며 불쌍한 표정을 했더니 남편이 피식 웃으며 고생했다고 안아주었다.


바다 위에는 커다란 보름달빛에 비친 윤슬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달빛에 눈이 부실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아무도 없는 어느 조그만 항구 어귀에 우두커니 서서 남편과 함께 왕대빵만한 달을 바라보며 오늘 버스를 잘못 타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일상을 여행처럼 살아보는 것도 참 좋은 것 같다.


집에 도착한 시간은 9:30분. 퇴근한 지 정확히 3시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참고로 우리 집에서 직장까지는 25분 거리다...) 점심 이후 쫄쫄 굶었던 우리는, 고생한 오늘 하루를 보상받기 위해 아주 오랜만에 야식을 시켰다. 그리고 쌈에다 고기를 2점씩 넣어서 아주 야무지게, 배 터지게, 맛나게 먹어치웠다.


달빛에 부서지는 윤슬이라니


부른 배를 두드리며 침대에 누워 가물가물 잠이 들며 생각했다.

오늘 길 잃기를 참 잘한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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