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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혼이 두려웠다

그 두려움을 마주하기 까지

다른 사람들은 '결혼' 하면 어떤 것들이  떠오를까?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잠들고 함께 눈뜰 수 있는 것'이라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 그 사람과 꼭 닮은 아이를 낳아 기르며 나만의 가족을 꾸리는 것' 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달콤한 것 혹은 포근하고 아늑한 무언가. 남들이 생각하고 꿈꾸는 결혼이 그런 것이었다면 나에게 결혼은 '결국은 서로를 망가뜨리고 상처 받게 하는 슬픈 관계의 시작'이었다.


어려서부터 보아온 대부분의 부부들은 '어쩌다가 저 둘이 결혼하게 됐을까' 싶을 만큼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서로를 비난하고 미워하거나 일방적으로 혹은 쌍방적으로 폭력을 행사했고,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함께 살아가고는 있지만 사실 남보다 못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주변에서 '그럴 거면 그만하라'는 말을 하면 그들은 '그간 살아온 정 혹은 아무 잘못 없는 자식'을 운운하며 뻔하디 뻔한 레퍼토리를 읊었다. 진짜 이혼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무엇이 그 관계를 유지하게 만드는지는 그들만이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해 할 수 없는 나름의 핑계와 이유를 들어가며 그 끔찍한 관계를 지속해나갔다.


결혼, 그 무시무시한 것에 대하여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 대신 의무와 원망으로 가득 찬 결혼생활. 그것은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인 족쇄를 양발에 차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 악을 쓰는 처절한 행위처럼 느껴졌다. 지금 두 사람의 양 발목에 얼마 만큼의 피가 흐르고 있는지, 그렇게 해서는 어느 쪽으로도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안쓰럽고 답답했다.


그 당시 나는 그들을 지켜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종종 무력감을 느꼈다. 만약 그것이 타인의 삶이기 떄문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거라면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그런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은 내 삶에서 없어져야 할, 내게 그저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우리 부모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은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설치된 곳처럼 언제 싸움이 일어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황이기 일 수 였고, 이내 터져버린 폭탄으로 처참한 잔해만이 남곤 했다. 나의 부모가 서로에게 쏟아내는 아프고 나쁜 말들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스란히 내 가슴에 남았고, 어린 시절의 나는 '이러다가 우리 가족이 사라지면 어쩌나' 하고 마음 졸이며 그 아픈 찌꺼기들을 품은 채로 살았다.


그런 환경은 내게 많은 마음의 흉터를 남겼다. 두 분이 싸우지 않도록 '나라도 잘해야 한다' 애를 쓰던 아이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어른이 되어 '무엇이든 잘하라'며 자신을 닦달하게 되었고, 작은 실수나 실패를 용납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항상 자기 탓으로 돌리며 자학하는 버릇을 갖게 되었다.


노심초사하던 것에 익숙해져서인지 항상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혹여나 미움받지 않을까 늘 불안해했다. 그리고 모두에게 사랑받기 위해 애를 쓰는 동안 두껍고 견고한 가면을 쓰고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누구에게나 참 좋고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나 자신에게는 참 괜찮지 못한, 한없이 가혹한 사람이었다.


심리학을 선택한 이유

내가 이런 자신을 견딜 수 있도록 지탱해준 것은 심리학이었다. 내가 고통받는 이유에 대해 알고 싶다는 막연한 마음으로 시작한 공부는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도구가 되어주었다. 누군가에겐 한낱 전공이었을 그 모든과정들은 나를 살리기 위한 심폐소생과 같았고, 지난 10년간 공부한 심리학이 조금씩 나를 살렸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나아질 수 있는지를 치열하게 들여다 보면서 나에게는 '한 사람의 삶을 망가뜨리는 상처라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절실하게 치료다면 언젠가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이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상담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상담자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많은 이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다. 그들이 살아온 삶의 궤도를 좇아 함께 걸으면서 마주한 것은 타인의 삶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깨어진 가정의 모습들이었다. 가난, 외도, 술과 도박, 폭력, 질병, 집착, 그 외에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 그들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마주했던 문제들은 내 삶에서 마주쳤던 그 어떤 것들보다 더 지독하고 복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어려움과 맞닥드려 싸웠고, 결국은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부부라는 이름의 족쇄를 차고서 괴로움에 발버둥 치는 그들의 모습은 예전의 내가 피하고 싶어 했던 그 결혼의 모습과 여전히 닮아있었다. 그러나 그 결혼생활이 그들 나름대로 치열하게 견뎌내어 온 소중한 삶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뒤, 나는 더 이상 그 노력들을 답답하고 안타까운 발버둥으로만 치부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먼발치에 서서 그저 그 상황을 안타까워하는 무력한 방관자에서 벗어나 그들이 발버둥을 멈추고 같이 걸어갈 방법을 함께 고민하는 조력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과정을 감당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이 그 치열한 고군분투를 혼자하도록 내버려 두고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삶이 너에게 레몬을 준다면
그것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


 '삶이 너에게 레몬을 준다면 그것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는 말이 있다. 이 세상이 내게 준 것이 몸과 마음의 상처라는 독이었다면 나는 그 상처들을 나 자신과 누군가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약으로 만들려 노력했다. 혼자서 시어 빠진 레몬즙을 짜먹다가 오만상을 지으며 레몬을 집어 던지는 대신, 함께 모여 각자가 만든 레모네이드를 들고 '삶이 참 시네요. 그래도 설탕을 치니 좀 먹을만 하죠?'라고 다독이는 것이 훨씬 나으니까.


물론 레모네이드를 만드는 과정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상담을 통해 누군가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의 아픔을 마주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담을 하지 않았다면 결코 얻을 수 없었을 수많은 경험들과 깨달음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 마음으로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타인의 삶이 내게 가져다준 것들 뿐만 아니라 내 삶이 내게 준 상처마저 감사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하고 기대한다.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의 삶과 함께 맞서 싸우면서 '살면서 결혼이라는 건 충분히 해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조금씩 생겨났다. 그들의 묵직한 삶은 내게 '결혼과 삶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환상'이 아닌 '나도 그 무시무시한 결혼이라는 걸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불어넣어주었기에, 그들이 내게 보여준 그 삶에 감사한다.


내가 이 결혼이라는 어마어마한 것을 하기로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두려움과 싸워야 했는지 그 누구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내 마음을 알기에 그 모든 두려움을 이겨내고 결혼이라는 걸 해보기로 결정한 나를 대단하다 칭찬해주고 싶다. 잘했다, 대견하다 하고.


이 길고 장황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지금부터 풀어나가고자 하는 이야기는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며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된 과정에 관한 것이다. 끔찍하고 두렵고 무시무시한 그 결혼이 내게 가져다 준 것들이 무엇인지, 지금의 내가 그 두려움을 마주하며 결혼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뭔지 기대하면서 앞으로의 이야기들을 읽어나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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