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밀표 비건 파스타와 세탁실에서의 향수
실컷 낮잠을 자고 있으니 점심때쯤 약속대로 카밀이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으로 파스타를 만들어 줄게!"
카밀은 쉬고 있으라며 거실 스피커에 음악을 연결해 줬다.
거실 침대 헤드에 올려진 작은 스피커 두 개가 실내 공기를 따뜻하게 바꿨다.
나는 소파베드에 기대어 오후 산책 계획을 세웠다.
카밀은 달그락달그락 요리 소리 너머로, 헬싱키에서 꼭 가봐야 하는 곳들을 말해줬다.
가스불을 켜고서는 빵집을, 양파를 볶다가는 암석교회를, 토마토를 볶다가는 미술관을 추천해 줬다.
쓰고 보니 뭔가 연관되어 있는 듯 아닌 듯.
요리를 끝낸 카밀이 식탁에 파스타가 담긴 접시를 올리더니
거실에 있던 직접 키운 풍성한 바질 화분에서 이파리를 몇 개 뜯어,
파스타 위를 장식했다.
카밀이 만든 파스타는 아주 신기한 비주얼이었다.
흔히 생각하는 파스타는 베이컨이나 푹 끓인 라구 또는 새우가 보기 좋게 올라가고, 소스는 되직하게 면과 얽혀있어야 하는데.
카밀의 파스타는 큼직한 야채가 눈에 띄는 비건 파스타였다.
베지테리언인 카밀은 밖에서 사 먹는 음식보다는 이렇게 집에서 요리해 먹는 것이 익숙하다고 했다.
파스타는 고기나 해산물은 없었지만 두유와 콩을 조려 넣어 단백질을 채웠고
다양한 야채로 다채로운 맛이 나는 재미있는 파스타였다.
특히 큼직하게 들어간 브로콜리는 소스를 한껏 머금어, 면과 함께 입에 넣으면 꾸덕하게 소스가 묻은 파스타 못지않게 풍부한 맛이 났다.
(이후 한국에 들어와서도 카밀표 파스타를 모티브한 파스타를 만들어먹곤 한다.)
드디어 빨래하는 날!
러시아 마지막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가정집이 아닌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기 때문에 빨래가 아주 밀려있었다.
다행히 카밀이 사는 멘션은 단지 안에 코인 세탁기가 있었다.
빨랫감을 들고 세탁동으로 향하는 길이 왠지 설레고 기분이 들떴다.
빨래가 오랜만이라 그런가?
곧 깨달았다.
그건 향수였다.
빨래를 세탁기에 넣는 동시에 새내기 때 살았던 송도 기숙사 A동 지하 세탁실이 떠올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의 울타리 밖에서 스스로 내 삶을 꾸리던 20살.
갈대밭이 전부였던 송도에서도 좋아하는 친구들과 왁자지껄 캠퍼스를 누비는 것만으로도
철저하게 즐거웠던 새내기 생활.
세탁실은 유난히 내가 좋아했던 장소였다.
옆옆방 친구와 세탁 약속을 하고 세탁기가 돌아가는 시간 동안 캠퍼스를 산책하기도 했고
주말 아침 한산해진 기숙사에 혼자 남아 미뤄둔 빨래를 하던 때
세탁실에 앉아 느끼던 적당히 쓸쓸하고 고요한 느낌도 참 좋았다.
카밀의 멘션 세탁실에서도 비슷한 공기가 흘렀다.
세탁기의 생김새도, 돌아가는 소리도 달랐지만
빨래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때의 고요한 마음은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빨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그 조용한 시간 속에서
나는 다시 그 시절의 나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