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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디맨 Aug 10. 2018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스포)

브루노, 니가 입고 있는 희고 아름다운 옷을 바라봐!

CHILDHOOD IS MEASURED OUT BY SOUNDS AND SMELLS
AND SIGHTS, BEFORE THE DARK HOUR OF REASON GROWS.

- JOHN NETJEMAN

'쉰들러리스트'나 '피아노'와 같이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여러 수작의 영화들 중의 하나로 보아도 무방하긴 하지만,

처음부터 우리(와이프나 나)의 시각은 약간 달랐던 듯 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어리석은 대중...

그리고 어리석은 신자(信者)를 떠 올렸다.




메인포스터


<스포주의>


2차 세계대전 중의 베를린, 8세의 브루노는 또래 친구들과 전쟁놀이에 여념이 없다. 그의 아빠는 유능한 독일군인이었고 승진이 되어 새로운 부임지로 이사를 가게 된다.


부루노의 할아버지는 이런 아들(브루노 아빠)을 무척 자랑스러워 하는 반면, 할머니는 나찌의 수하가 되어버린 것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자책하며 괴로와한다.

독일군 사령관인 브루노의 아빠, 마틴

이사를 가게 된 곳은 바로 유태인 포로수용소가 있는 곳.

아빠는 포로수용소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쓰레기'같은 유태인들을 '소각'하는 임무를 맡는다. 물론 가족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학교가 없어 배울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아빠는 튜터를 집으로 부르고 브루노의 누나인 그레텔은 그의 사상교육을 받으며 나날이 나찌즘에 물들어 간다. 한편 브루노는 같이 놀 친구들이 없는 것과 튜터의 따분한 교육 때문에 점점 더 힘들어 한다.

무료함을 달래고 있는 브루노

그러던 중 우연히 출입금지 구역인 뒷뜰의 문을 통해 외부로 나가게 된 부루노는 철조망으로 둘러 싸여진 포로수용소를 발견하고, 그 곳에 사는 동년배인 슈무엘이라는 아이를 만나게 된다.


브루노는 또래의 친구들이 모여 있는 그 철조망 안의 생활을 동경하며, 슈무엘과의 교분을 쌓아 간다. 어린 브루노에게 전쟁이나 포로, 수용소 등의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더구나 유태인 학살이란 상상 할 수 조차 없는 초월적인 어떤 것일 터였다.


그에게 군인인 아빠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좋게 만드는 일을 하 좋은 사람' 쯤으로 인식되어 있고, 집에서 일하는 유태인 포로 파벨은 '감자 깍는 일이 좋아서 의사 일을 그만 둔 괴짜 아저씨'쯤으로 알고 있다.

브루노와 슈무엘의 조우 장면

우연한 실수로 인해 파벨 아저씨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대신 슈무엘이 집안 일을 하러 오게 된다. 브루노는 무척 반가운 마음에 슈무엘에게 과자를 먹게 하지만 부사관에게 발각이 되면서 분위기는 험악해진다. 슈무엘은 친구인 브루노가 주어서 먹었을 뿐이라고 변명을 대지만 부사관의 호통에 겁에 질린 브루노는 그 사실을 부정하며 슈무엘을 처음 보는 아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슈무엘은 그 일로 인해 모진 벌을 받게 되고, 브루노는 심한 자책에 마음 아파하지만 우연히 훔쳐 보게 된 포로수용소 소개 영상을 보고는 다시금 희망찬 마음으로 슈무엘을 찾아 간다.


물론 그 소개 영상은 수용소를 방문하는 외부인사기만하기 위해 만들어진 홍보영화로 마냥 편하고 재미있는 수용시설을 그리고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몰래 슈무엘을 만난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엄마

슈무엘을 찾아 간 브루노는 아빠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슈무엘의 말을 듣고는 친구를 부정했던 자신의 용서도 구할 겸, 함께 수용소 안에 들어가 슈무엘의 아빠를 찾아 보자는 제의를 한다.


다음 날 약속한대로 슈무엘은 브루노를 포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죄수복(줄무늬 파자마)을 구해 오고, 미리 삽을 준비해 온 브루노는 철조망 밑을 파고 안으로 들어 간다.


슈무엘의 아빠를 찾아 어느 막사를 함께 뒤지던

줄무늬 파자마의 두 소년은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들에 의해

가스실로 휩쓸려 들어 가게 되고 그렇게 그 유태인 포로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이 영화를 통해 우선적으로 파시즘의 몰인간성과 파괴성을 바라 보게 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 파시즘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브루노의 할아버지와 같은 독일의 평범한 대중들이다. 그들이 히틀러를 만든 장본인임을 직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부사관의 부친이 열성분자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좌천을 시켜버린 사령관 마틴(브루노의 아빠) 역시 어머니(부루노의 할머니)는 나찌의 반대자였으며, 아내마저도 남편의 임무를 알게 되고나서 부터는 그를 짐승처럼 경멸하게 되었으니, 사실 별반 다르지 않은 수준의 일개 독일군인일 뿐인 것이다. - 다행히 직계가 아닌 모친 쪽이라 공식적인 징계를 당하지 않은 것일 뿐.

그런 그를 더욱 더 미치광이로 만들어 간 것은 다름아닌 할아버지와 같은 우익의 칭찬과 자부심이었다. 영화는 그의 아들(직계) 브루노를 그토록 증오하는 유태인 포로와 똑같이 만들어 버림으로써 그 위선과 허세의 광기를 무상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 과정에서 8세의 어린 아이인 브루노는 어리석은 대중의 예표인 것처럼 느껴졌다. 역사에 대해서도 무지하고, 군인아빠의 임무가 무엇인지도 모르며(무관심했다), 굴뚝에서 나는 검은연기와 악취도 간과하고, 그리고 철조망 안의 삶마저 선동적인 거짓 영상에 속아 동경하게 되는...

그리하여 결국 자신에게 보장된 안위의 삶과 목숨마저도 어이없이 상실하고 마는 어리석은 대중을 보여 주고 있었다.


갑자기 니뮐러 목사의 시가 생각났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갈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그들이 사민당원들을 감금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잡아갈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유태인들을 잡아갈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나를 잡아갈 때,
나를 위해 항의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또 한가지 관점은 신앙적인 차원에서이다.

"브루노, 니가 입고 있는 희고 아름다운 옷을 바라봐!" - 이것은 이 영화에 대해 와이프가 한 말이다.


정말 깨어있는 성도라면 자신의 신분을 깊이 인식하고 있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성도)의 신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놓으셨는데 허상에 둘러 싸인 무지한 자들은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는 세상에 모든 시선을 빼앗기고 있으며, 이런 지금의 상황은 어쩌면 영화 속의 브루노와 너무도 닮아 있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고 싶어 할 것이 아니라, 수인번호가 무슨 게임처럼 재밌을 것이라 상상할 것이 아니라, 지금 입고 있는 희고 아름다운 옷을 바라보고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아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

나는 아내의 그 말을 이렇게 받아 들였다.


아직 국내 개봉된 영화가 아니라 많은 관람평이 있지는 않지만 일부 어떤 분들은 브루노의 죽음을 아쉬워하고 슬퍼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슬픔을 느껴야 하는 영화인 것은 맞다)


하지만 왜 브루노인가? - 단순히 유태인들의 학살이나 전쟁의 참상 따위를 슬퍼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 속에는 나는 슈무엘처럼 버려진 자들, 실패한 자들의 서열에 있지 않다는 자아인식이 깔려 있다. 나는 그들의 죽음에 대해 무죄하다는 인식, 내가 그들과 같은 죽음에 처해 있지 않아 다행이라는 인식을 누리고 싶은데 혹시 그 프레임이 깨어져 버려서 슬픈 것은 아닐까....?



나는 오늘도 이 땅에서

여전히 파시즘의 냄새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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