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 그녀로 인해 병드는 가족들

인내함으로 평화를 찾았다

by 난향C

그녀의 친엄마가 돌아가신 후 얼마 되지 않은 후 그녀의 집에 들어온 새엄마는 모든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피하게 만드는 재주를 가졌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고 3초에 엄마가 돌아가신 후 다음 해 그녀가 어찌어찌 학교를 졸업한 후 아빠의 권유로 먼 친척 집 할아버지 댁에 집안일을 도와주면서 지낼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집안일이라고는 해보지도 않았던 그녀가 그곳에서 무슨 일을 도울 수 있었을까?)


그렇게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녀가 마주한 새엄마는 인상부터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삭 마른 얼굴이 검고 눈이 푹 들어간 유난히도 화장을 짙게 하고 표정은 언제나 무엇인가 불만이 가득하고 화가 가득한 그런 모습이었다.

한 번도 친절한 목소리를 들어 보지 못했고, 누구 앞에서나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아니 해댄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녀가 여고를 졸업하고 그녀의 집에 들어왔으면서도 남들에게는 그녀가 학교 다닐 때는 어땠고, 공부는 어땠고, 성질을 어땠으며 듣는 사람조차 민망한 거짓말을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하고 다녔다.

그런 새엄마가 싫었다.

'언제 자기가 나를 키우기나 했단 말인가?'

'왜 저렇게 없는 소리를 지어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매일 저녁마다 술을 마시고 아빠를 들들 볶을 때는 차라리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인가는 아빠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차라리 그냥 가버리라고 하세요"

"왜 매일 울고불고 날리래요"

"도대체 이제 와서 무얼 했다고 날마다 돈을 내어 놓으라고 한데요?"

"차라리 제가 다 할 테니까 제발 가라고 하세요"

매일 징징대는 소리에 화가 치밀어 올라 아빠에게 그녀 다운 말을 해버렸다.

그녀는 차라리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그녀가 할 수 있을 거라고,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계속해서 이렇게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직은 어렸던 그녀에게는 그게 최선의 방법인 거 같았다.


그녀의 아빠도 예전에 그녀의 친엄마하고 살 때 하고는 엄청나게 변해버린 자신이 처지에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하셨다. 그러나 새엄마가 돌아가신 후 말씀하셨다.

'죽을 만큼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 그래야 가정을 유지하고 아직 어린 자식들 밥이라도 해 먹이면서 살 수 있으려면 침아야 했었다'

'아니었으면 집안에 여자가 얼마나 많이 오고 가면서 살아갈 수 있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렇게 참지 않았으면 집안에 자식들도 뿔뿔이 흩어져서 살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녀의 엄마가 살아계실 때는 '우리 집 대통령'으로 군림하면서 살셨던 아빠다. 삼시 세끼 따뜻한 밥에, 한량처럼 집안일은 돌보지도 않으셨고, 모든 집안의 일과 농사일까지,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 돌봄까지 전부가 그녀의 엄마 차지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엄마는 밖에서 술을 드시고 들어오시는 아빠의 발까지 닦아드리면서 모심을 받고 살아오셨다.


그런 그녀의 아빠는 끼니때마다 제대로 된 밥조차 얻어먹지 못하고, 허구한 날 술을 마시고 담배까지 피우면서 난동을 피우는 그런 새엄마와 얼마나 참고 인내하면서 살아오신 걸까?

그 때문에 위궤양까지 걸리고 건강의 이상이 오고 힘들어서 쓰러지는 일까지 발생하면서도 눈치를 보면서 사셨다.

어쩌다 가줄 하듯 분가한 그녀나 아들이 쌀을 보내달라고 하면 새엄마한테 말하라고 하셨다. 그 당시는 집집마다 쌀을 도정하는 기계가 따로 있지 않았다.

방앗간에 벼를 가져다주고 그곳에서 도정하여 쌀을 가져와야 했다. 그러니 아빠는 방앗간에 가서 도정해서 택배로 딸이나 아들에게 보내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새엄마에게 허락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정말 화가 나고 속이 상했다.

'이러니 자식들에게 엄마가 돌아가시면 아빠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구나!'

그렇게 군림하면서 왕처럼 살던 그녀의 아빠는 집안이 시끄럽다는 이유로 모든 걸 엄마의 눈치와 허락을 받고 간섭을 받아 가면서 살고 있고, 전처 자식인 우리에게 아무것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아니 주지 않고 모른척하면서 자식들을 내 팽개쳤다.

그녀는 남들처럼 한번도 시골에서 반찬을 받아본적이 없는 그런 시골 소녀였다.

그렇게 아빠가 없는 자식들처럼 우리는 살고 있었다.


어쩌다 명절 때, 일 년에 한두 번씩 고향이라고, 부모님을 뵈러 가서도 아무것도 받아오지 못하고(농촌이라 지천으로 밑반찬거리가 가득했지만) 그저 도리어 돈을 내어 놓으라는 새엄마의 말과, 여러 가지 일로 상처를 받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러니 고향이라는 곳이 그립고 좋은 곳이 아니라 짜증 나고 싫은 곳이 되어 갔다.

집에 함께 살고 있는 둘째 동생네는 하루 열두 번도 더 변하는 새엄마의 기분을 맞추려면 자신을 포기하고 영혼까지 내어 놓아야 할 정도였다. 아들이 힘들게 벌어들이는 모든 것은 다 새엄마가 가져갔다. 아니 갈취였다고 할 수 있겠다. 결혼을 하고 자녀까지 있었지만 자녀들을 돌볼 수 없었다. 그 새엄마의 변덕스러운 횡포에 집안에서 있기를 포기한 둘째 며느리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밖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겨우 식사 때만 집안에 들어와서 또 식사를 차리고 치우고는 다시 밖으로 나가 일에만 매달렸다.

그것만이 그 며느리가 이 집안에서 견딜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조금이라도 덜 부디치고 살아갈 방법이 죽도록 일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자녀들은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하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고스란히 그 모든 것들을 그저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둘씩 자녀들이 결혼을 하면서 모두들 스스로 부모가 없는 것처럼 자립하면서 살아가고 있었고, 그렇게 그녀의 집안에 가족의 일원으로 들어온 며느리들은 처음엔 자신의 부모님과 다른 새엄마의 모습에 대단히 충격을 받았고 적잖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포기하고 적응하면서 견뎌내어 주고 있었다.

어쩌다 한 번씩 명절이나 행사 때에 내려오면 여지없이 상처를 받고 눈물을 흘리고 돌아가기가 반복되었다.

그녀는 그런 동생네를 바라보고 안쓰럽고 가슴이 아팠다. 처음엔 그런 사정을 알지 못하고 나중에서야 여러 가지 상황들에 힘겨워하는 동생들을 알게 되었고, 넉넉하여 도와주고 보듬어 줄 수 없어서 항상 마음이 아렸다. 그런 동생들과 힘겹게 잘 살아 보려고 노력해 주는 그녀 들를 볼 때마다 고맙고 감사해서 눈물이 나게 미안했다.


그녀가 가출하듯이 떠나오고 아직 여렸던(막내 남동생이 초등학교 6학년 13살이었다) 동생들이 어떤 대접을 받으며 고난을 받고 고아처럼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자라 왔는지 그녀는 상상하지 못했다.

시간이 한참을 지난 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어쩌다 한 번씩 우연히 듣게 된 그 동생들의 한두 가지의 이야기들에 마음이 아파 눈물을 삼키지 못하고는 하였다.

겨우 중학교를 집에서 마치고 나온 막내가 소풍이나 운동회 때 한 번도 김밥이란 걸싸 가보지 못하였고, 김치 국물이 줄줄 흐르는 도시락을 혼자서 몰래 먹어야만 했던 그 순간들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입고 다니던 옷도 제대로 된 바지 하나를 사주지 않고, 제대로 빨아주지도 않아서 그 어린 마음에 부끄럽고 창피함을 견뎌야만 했던 그런 일들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아빠는 안 계시는 거나 다름없이 자식들에게 아무런 힘이 되어 주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녀가 늦게 나마 결혼을 할 때도 아무런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던 아빠는 부모님이 자리에 초대장을 받고 처음으로 도착한 손님처럼 참석했었다. 그저 초청을 받은 다른 하객들처럼 말이다.

평생을 그렇게 새엄마의 눈치를 보시면서 자식들을 위해 힘겹게 참으신 아빠도 이제 새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자식들에게 잘 표현하지 못하는 애정 표현을 조금씩 하시고 미소를 찾으셨다.

어찌 한 가정이 엄마라는 사람이 이토록 모든 가족에게 상처를 주면서 자신만을 위해서, 아니 평생 자신만 불행했노라고 불평을 하면서 살아오신 그분은 그나마 가시기 며칠 전 그토록 힘들게 했던 둘째 며느리에게 자신의 분신인 딸에게 미안하다고 또한 교회에 가서도 모두 회개하고 내려놓고 떠나셨다고 한다.


좋은 새엄마도 있다는데 하필 팥쥐 엄마를 만났던 그녀와 동생들은 아빠 말에 그래도 덕분에 자립하면서 견디고 살아온 것이라고 하시니 그 말이 맞을 찌도 모르겠다.


평생을 죽을 힘을 다해 참고 살아오셨던 그녀의 아빠도, 또 죽을 만큼 힘들게 참고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참아와던 아들과 며느리들도 평생동안 자신의 엄마에게 죄송하고 동생들에게 미안했던 그녀도 이제는 각자의 자리에서 마음도 몸도 치유하면서 서로를 도우면서 사랑으로 잘 살아가 주고 있는 동생들과 가정과 아이들 위에 하나님이 축복이 함께하여 행복하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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