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탓에서 나이 덕분으로

내가 품고 온 계절들이 말을 걸 때

by 난향C


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에 새겨진 얕은 주름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예전에는 이것들이 그저 세월이 빼앗아 간 젊음의 흔적이라 생각하며 서글퍼하기도 했다. 하지만 60세에 다시 가방을 메고 학교 교정을 걷는 지금, 나는 이 주름들이 단순한 노화의 상징이 아님을 깨닫는다. 나이는 결코 숫자로만 쌓이지 않는다. 그 켜켜이 쌓인 시간의 단면 안에는 각 시절이 남긴 감정의 결, 치열했던 선택의 흔적, 그리고 무엇보다 모진 풍파 속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는 조용한 증거들이 나이테처럼 눌러앉아 있다.


우리는 새로운 도전을 꿈꿀 때 흔히 주변으로부터, 혹은 스스로에게서 “이 나이에?”라는 질문을 가장 먼저 받는다. 그 질문은 대개 ‘불가능’이나 ‘민망함’이라는 결론을 향해 달려간다. 그러나 60년이라는 세월을 건너온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나는 이 나이까지, 무엇을 가슴에 품고 여기까지 왔는가.” 33년의 공직 생활을 견뎌낸 인내심인가, 아이를 지키기 위해 지옥 같은 절망을 뚫고 나온 모성인가, 아니면 한겨울 차가운 엔진을 예열하며 기다릴 줄 알았던 그 지독한 성실함인가. 우리가 품고 온 그 귀한 것들이야말로 새로운 배움을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토양이 된다.


젊을 때의 배움에는 ‘속도’가 있었다. 이해되지 않아도 일단 머릿속에 집어넣고, 시험지를 채우고 나면 금방 잊어버려도 다시 돌아볼 시간이 충분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시작한 배움은 결이 다르다. 비록 암기하는 속도는 느려졌을지 모르지만, 대신 그 자리에는 묵직한 ‘의미’가 들어찼다. “내가 왜 이 조리법을 배우는가?”, “이 배움이 내 삶의 어느 아픈 구석을 어루만지는가?”, “배운 지식이 나를 어떻게 인간답게 바꾸는가”를 끊임없이 스스로 묻게 된다. 그래서 늦은 배움은 결코 얕을 수 없다. 책 속의 한 문장, 강의실의 한 개념이 단순한 지식을 넘어 내 삶 전체의 경험과 연결되며 혈관을 타고 깊숙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젊은 동기들이 요리 비법을 외울 때, 나는 그 요리에 담길 ‘사람의 마음’과 ‘세월의 맛’을 먼저 떠올린다. 이것이 바로 ‘나이 덕분에’ 가질 수 있는 배움의 깊이다.


나는 참으로 여러 개의 나이를 통과해 여기까지 왔다. 꿈을 포기해야만 했던 열망의 나이, 가장의 책임이 앞서 나 자신을 지워야 했던 헌신의 나이, 그리고 투자 사기라는 거대한 풍랑 앞에 서서 나 자신을 가장 뒤로 미뤄두었던 절망의 나이까지. 돌이켜보면 이 모든 나이는 단절된 토막이 아니라 하나의 선으로 이어진 연결이었다. 1988년 운전면허시험장의 차가운 공기를 견뎠던 서른 살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다시 무거운 가방을 멜 근력이 생겼고, 오늘 나의 이 서툰 선택은 70세의 나를 조금 더 웃게 만들고 덜 후회하게 만들 것이다. 과거의 고통조차 현재의 나를 만드는 귀한 거름이 되었음을 인정할 때, ‘나이 탓’을 하던 원망은 비로소 ‘나이 덕분’이라는 감사로 변모한다.


사람들은 인생을 흔히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나눈다. 은퇴하면 전반전이 끝났으니 이제 승패가 결정된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내가 살아보니 인생은 그렇게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다. 우리는 매 순간 새로운 전반전을 시작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존재들이다. 60세에 대학 신입생이 된 나는 지금 인생의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전반전을 새로 시작하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시작은 더 조심스럽고 훨씬 더 큰 용기가 있어야 하지만, 그만큼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 아닌 ‘진짜 나의 얼굴’에 가까워진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화려한 수식어가 아니라, 내가 나를 정의하는 순수한 주어와 동사만으로 이루어진 삶. 그것이 60대의 배움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이 나이에 다시 안경을 고쳐 쓰고 리포트와 씨름하는 일은 누구와 경쟁하기 위함이 아니다. 나의 유능함을 누군가에게 증명하기 위함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나는 여전히 나를 확장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세상과 나 자신을 향한 조용하고도 위대한 선언이다. 그리고 나의 이 작은 선언은, 나와 비슷한 아픔을 겪었거나 시작을 망설이는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시작의 신호탄이 된다. 내가 60세에 학사모를 쓰는 뒷모습을 보며, 나의 딸이 인생의 어떤 시련 앞에서도 “우리 엄마도 해냈는데 나라고 못 하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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