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구부정하면 어때

by 산밑하나

장마 시작이라더니, 어제는 정말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비가 오는 날이면 태평하게 고양이와 누워 하루 종일 잠을 자거나 빗소리를 만끽하며 커피 한 잔과 독서를 즐기곤 했는데, 이제는 밭에 있는 작물들을 걱정하느라 하루가 다 간다.


비보다도 바람이 더 문제다. 올해는 무슨 일인지 봄부터 아주 강한 바람이 불고 있다. 작물들이 아직 어려서 키가 작았을 때에는 크게 문제 되지 않았지만 쑥쑥 자라 내 허리까지 오는 지금은 이렇게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지면 고꾸라질까 봐 걱정이 된다. 미리미리 지지대에 잘 묶어뒀으니 괜찮겠지, 하다가도 또 걱정이 된다.


비가 그치고 날은 갰지만 왠지 처지는 몸과 마음을 이끌고 밭으로 향했다. 토마토부터 고추, 오이를 심어놓은 긴 이랑을 찬찬히 둘러보러 갔다. 토마토는 비를 맞고 나서 엊그제보다 한 뼘은 더 자란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지지대를 연장해서 세워주어야 할 것 같다. 고추는 미리 묶어뒀던 끈이 헐거웠는지 이리저리 휘어져 있었다. 아래로 흘러내린 끈을 다시 위로 올려 조여 묶어 주었다. 방아다리 위로 갈라진 줄기들을 살짝 모아 끈을 매어주면 중심을 잘 잡는다.


하나씩 끈을 다시 고쳐 묶어주다 줄기가 아예 꺾여버린 고추를 발견했다. 두 동강이 나서 줄기 속을 드러낸 채로 잎사귀들을 바닥에 처박고 고꾸라져 있었다. '이럴 줄 알았지. 위쪽으로 잘 묶어뒀어야 했는데.'라고 조금 아쉬워하며 끊어진 고추의 윗부분을 그 옆에 놓아두고 다시 다음 고추의 끈을 묶어주었다.


고추는 다섯 개만 심었다. 그렇게 심어도 잘 키우면 둘이서 먹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이번 비바람에 고추가 두 개나 부러졌다. 두 번째 부러진 고추의 발견은 약간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내가 열심히 걱정했으니 대신에 이 녀석들이 알아서 잘 버텨주길 바랐던 건지, 그 고추에는 방아다리 위쪽으로 아예 끈이 안 묶여있었다. 이러면 부러질 수밖에 없다. 이로써 고추는 3개가 남았다. 소중하게 잘 키워야 한다.


키가 부쩍 자라 버린 토마토들도 한 번 더 묶어주기로 했다. 어렸을 때부터 차례로 끈을 잘 묶어준 토마토들은 줄기를 위로 곧게 잘 뻗었다. 그런데 유독 하나가 이리저리 휘어져 지지대 저 반대쪽으로 머리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마 아래쪽 어디에선가 묶어줘야 하는 시기를 잠깐 놓친 사이에 바깥으로 기울어져 버린 것 같다. 지지대에서 너무 멀어지면 묶어주기도 힘들고 잎사귀들이 길을 침범해 고랑으로 지나다니기도 힘들어지니까 이번엔 좀 붙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고 토마토 줄기가 부러졌다. 윗부분을 당기면 세워질 줄 알았는데 그냥 부러져버렸다. 거센 비바람을 버텨낸 기특한 토마토를 똑바로 세워주려다 부러뜨려버렸다. 더군다나 다른 토마토들보다 열매도 빨리 많이 맺은 녀석이었다. 부러진 윗부분을 혹시나 다시 자랄까 싶어 부러진 고추 옆에 다시 파묻어주었다. 토마토를 부러뜨렸다는 충격에 주렁주렁 열려있던 오이를 따 오는 것을 까먹었다.


그냥 휘어져서 자라게 둘걸. 똑바로 세워주려다가 아주 꺾어버렸다. 토마토에겐 미안하지만, 덕분에 나에게 부리고 있던 욕심을 발견했다. 나는 나도 억지로 세우려 하고 있었다. 사실은 충격적이고 힘들었던 사건들을 벌써 몇 달째 마주하지 않고 있었다. 그냥 받아들이면 되지, 그래도 좋은 점들이 있으니까 그것들에 집중하는 게 더 중요하지, 점점 괜찮아질 거니까 지금도 괜찮다며 이미 바닥을 친 마음을 외면하고 있었다. 내 마음도 사실은 지쳐서 고꾸라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계속 억지로 일으키고 있었다.


부러질 뻔했다는 걸 깨달았으니, 억지로 세우지 말고 지금은 좀 구부정하게 지쳐있기로 했다. 나에게 그럴만한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누군가는 같은 일을 겪고도 괜찮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게 안돼서 너무너무 힘든 마음이라는 것을 싫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라도 내 마음이랑 같이 좀 고꾸라져서 그 이야기나 들어주면서 누워있다 보면, 때가 되면 알아서 일어나겠지. 아니면 좀 구부정하지만 대신 크고 맛있는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토마토가 되어도 좋겠다.


구부러진 마음하고 누워서 아직 살아남은 다른 마음들을 올려다봐야지. 그 마음들은 햇빛 받고 잘 자라게 응원이나 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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