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영화의 결말이 포함돼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매 순간 선택을 한다. 이 학교에 갈 것인가, 이 사람과 인연을 계속해 갈 것인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결혼을 할 것인가, 아이를 가질 것인가, 심지어 치킨을 먹을지 피자를 먹을지까지 모든 순간은 선택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한 번쯤 과거의 선택을 점검한다.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그때 저 길을 택했다면 나는 지금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혹은 내게 주어진 환경이 조금 달랐다면 어땠을까.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인간에게는 수없이 많은 후회와 선택하지 않았기에 알 수 없이 빛나는 미래가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는 그 모든 선택과 갈림길을 모두 경험한 인간이 있다.
조부 투파키 앞에는 그 어떤 생명도 귀하지 않다. 처음 등장한 그의 모습은 괴랄하고 요란하며 어떤 표정을 지어도 냉랭해 마치 감정이 없이 잔인한 행위를 손쉽게 해내는 것 같아 보인다. 그가 정말 그저 잔인한 존재였다면 이 우주에서 마주한 엄마, 에블린을 무언가 설명할 필요 없이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멈춰 서서 이 우주의 약해빠진 에블린이 다중 우주를 넘나들 능력을 깨우치도록 돕는다. 그리고 자신 안에 어떤 구멍이 있는지를 알려준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된다. 그의 공허와 잔인함은 그가 타고나길 잔악무도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느낀 사람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선택과 인연으로 뻗어나간 각기 다른 우주 속에서 수많은 동일 인물들이 살고 있으니 이 우주의 한 명이 죽는다 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 모든 인간이 각 우주에서 각기 다른 괴로움과 슬픔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을 보고 듣고 공감하고 그래서 깊은 허무에 빠지며 결국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에 잠식돼 그들의 생명조차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저 심심해서 베이글 위에 올린 것들은 순수하고 사소하다. 꿈과 희망, 성적표, 다양한 정보, 참깨, 소금 같은 것들이다. 그는 사실 꿈과 희망을 갖고 일상의 것들에 둘러싸여 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중 한 우주에서 엄마인 에블린이 딸을 향해 과도한 욕망으로 그를 한계 이상으로 몰아붙이고 그는 동시에 모든 곳에서 모든 것을 경험한 뒤 깊은 허무에 빠진다. 그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괴로움이나 좌절감도 아무것도 아닌 게 되니 다행이라고 한다. 그렇게 조부 투파키는 자신에게 한계 이상의 잣대를 댄 엄마를 만족시키지 못한 괴로움과 좌절감, 또는 일상생활에서 오는 사소한 괴로움과 좌절감 모두를 잊을 방법을 찾았다.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수많은 우주 어딘가에서 자신과 함께 모든 것을 경험하고 이 깊은 허무를 알아주고 함께 무無로 사라질 엄마를 찾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에블린은 그 다중 우주 경험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지만 이 세계의 에블린은 그중 가장 약하기에 조부의 허무함을 더욱 잘 이해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허무를 느낀 에블린은 온갖 우주에서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준다. 이 우주에서 에블린은 웨이먼드의 몸에 유리조각을 찌르고, 함께 미국으로 떠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살아 성공한 다른 우주에서는 웨이먼드에게 당신과 결혼했다면 세금 걱정하며 세탁소나 하고 있었을 거라 비꼬며 상처를 주려 한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욕망해 보고 모든 것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그 어떤 것도 보람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알았다 해서 모두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팍팍한 삶 앞에 억척스러워지고 쌓인 피로감으로 불친절해지는 것은 쉬운 선택이다. 그렇다면 불친절한 사람에게 쿠키를 선물하고, 사랑하는 이가 나에게 상처 줄 때에도 친절하고, 그가 힘껏 깨뜨린 유리 파편을 조용히 쓸어 담고, 내가 없는 삶이 훨씬 더 좋다는 이에게 나는 이 성공보다 당신과 함께하는 삶을 더 원한다 진심으로 말하는 다정함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 용감한 다정은 속이 텅 빈 사람의 마음도 채운다. 함께 세탁소에서 손님을 초대해 파티를 하던 웨이먼드는 에블린이 궁지에 몰릴까 세무서 직원을 다시 한번 설득하고 에블린이 깨뜨린 유리창 파편을 구부정한 어깨로 쓸어 담는다. 아내에게 옆구리를 찔린 웨이먼드는 고통을 참으며 에블린을 등지고 막아선다. 그는 에블린을 공격하려 모인 모든 이에게 다급히 외친다. 혼란스러울 때 우리는 더 친절해야 한다고. 에블린과 함께하지 않은 삶에서 성공한 웨이먼드는 말한다. 그럼에도 다른 삶에서 당신과 함께 세금 걱정하며 세탁소를 하고 싶다고.
뛰어난 능력에 눈을 뜨고 모든 인생을 굽어본 조부 투바키에게 이 가난하고 볼품없고 지긋지긋한 우주에서 주어진 이름은 '조이(기쁨)'이다.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도 공허하고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며 에블린에게도 더 나은 현실과 딸이 있는 다른 세상으로 가라고 외치는 조이의 얼굴에 기쁨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는 허무함을 내뱉으며 동시에 제발 나를 살려달라는 애절한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본다. 작은 돌로 존재하던 우주에서 조이는 엄마는 혹시 다른 해결책을 알까 기대했다는 말도 흘린다. 에블린은 그런 조이를 안는다. 나는 어떤 세상이든 너와 함께 있고 싶어, 그저 지나가는 찰나일 뿐인 이 인생에 너와 함께 있고 싶다. 에블린은 그 어떤 삶이든 단 하나의 조이도 파괴하지 않고 조이의 엄마이기를 선택했다. 돌이 된 에블린은 조이를 따라 절벽 아래로 구른다. 혼자라도 허무로 똘똘 뭉친 베이글 속에 들어가려는 조부 투파키를 온 힘을 다해 붙잡는다. 그 뒤에는 에블린의 아버지와 남편 웨이먼드가 힘을 보탠다. 극한의 허무에 빠져 손에 닿는 것을 파괴하던 조부 투파키는 이제 그저 딸이 되어 엄마의 품에서 무너지듯 울음을 터뜨린다.
세상은 시끄럽고 나에게는 기회가 열리지 않아도 다른 사람은 다 나보다 행복한 듯 보이는 멀티버스 같은 지금을 살면서 우리는 때로 과부하를 겪는다. 가족이나 노동, 친절함 같은 희생적인 가치는 멋없어 보이고 오로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최고로 여겨질 때도 많다. 허무함에 빠져 나를 파괴하는 줄도 모르고 타인을 우롱하거나 다른 이의 고통에 눈을 감는다. 그런 세상에 살다가 이 정신없고 때로는 불편하고 웃기고 울리는 다중우주를 보고 사람은 누구나 다정함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적잖이 위로가 됐다. 가족 중 가장 약하고 무시당하던 웨이먼드가, 하잘것없어 보였던 그의 친절이 가족과 세상을 구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웨이먼드는 그렇게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그로 인한 허무에 다정함으로 맞선다. 구부정한 어깨로 에블린이 깨뜨린 유리창 파편을 쓸던 그는, 허무에서 빠져나온 에블린이 다가가 안자 그 어떤 반격도 자존심도 내비치지 않고 완전히 안도한 얼굴로 받아들인다. 그가 보여주는 다정함은 지난 4년 간 쉴 새 없이 육아하며 '나'가 없다는 허무에 빠져 있던 내 마음을 쿵 쳐서 깨뜨렸다. 그날 밤 영화를 다 보고 침대에 누웠는데 먼저 잠자리에 든 남편이 아직 자지 않고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웨이먼드에 대해 얘기했다. 다정함이 어떻게 사람과 세상을 구하는지, 가깝고 믿는 사이이기에 잊기 쉬운 그 단순한 구원을 말했다. 그 모든 선택지 중에 가난하고 걱정 많아도 당신과 함께 살고 싶다는 그의 말이 얼마나 깊은 사랑인지 이제 우리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