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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와 요정

엄마 경력 5년째

by 김영지



첫 아이 이서는 이제 산타의 존재를 인식하는 나이가 됐다. 겨울이 되며 이 따뜻한 플로리다에도 온통 반짝이는 장식이 가득한데 산타 그림과 장식들, 온갖 책들, 영화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서도 산타에게 선물을 받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전까지 우리는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특별히 사준 적이 없었고 이번 해가 기점이 될 터였다. 주변 엄마들은 그래도 아이가 산타를 믿는 게 즐겁지 않냐며 작은 선물을 준다고 했다. 나는 가까운 친구에게도 물어봤다. 크리스천인 그 친구는 한국에서 아이에게 어떻게 해주는지 궁금했다. 친구는 아들이 산타를 예수님의 조수로 알고 있다고 했다. 예수님이 주신 사랑을 서로에게 나눠주는 의미인데 산타가 배달을 해주는 역할이랄까. 그것도 좋은 생각 같았다. 문제는 언젠가는 아이에게 산타가 현실의 존재가 아닌 것을 알려야 한다는 거였다. 그럼 그건 도대체 언제 알려야 하나? 나는 AI에도 물었다. 미국에서는 가족들끼리 서로 선물하고 함께 뜯어보기 때문에 산타 문화를 어떻게 적용하는지 물었는데 아주 자세히 대답해 줬지만 내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다. 사실 내가 가진 본질적인 문제는 크리스마스는 사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거였다.


나는 고민에 빠진 채로 이서를 학교에 보내고 둘째 이한이와 마트를 둘러봤다. 수첩 같은 작은 선물은 줘도 괜찮으려나. 그냥 크리스마스라는 따뜻한 기분을 내는 거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나는 5불도 안 되는 수첩과 펜 세트를 들었다 놨다 하다가 그냥 두고 나왔다. 나는 딱 이서가 좋아할 것처럼 생긴 수첩을 괜히 살짝 뒤쪽에 넣어두고 나오며 남편에게 연락했다. '이런 작은 선물을 주는 건 어떨까?' 남편은 크리스마스가 선물 주는 날이냐며 성탄의 기쁨과 감사만 나누면 되는 거라고 딱 잘랐다. 아. 대문자 T이자 쌉T이자 이 세상 내가 경험한 그 누구보다 T인 남편의 말에 살짝 짜증이 났지만 동시에 어수선하던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날 오후 아이들 오후 간식을 챙겨주려 부엌에 서있었다. 이서는 거실의 책상에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서가 만든 것을 들고 와 나에게 줬다. "엄마, 도장 찍어서 만든 포장지예요. 크리스마스에 선물 못 받는 친구들한테 산타할아버지가 이걸로 포장해서 주라고." 나는 포장지를 손에 들고 이서를 불렀다.

"이거 너무 좋은 생각이다. 이서야, 엄마가 생각해 봤는데. 이서 얼마 전에 생일이었고 이서가 갖고 싶었던 선물은 이모, 삼촌들이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사주셨잖아."

이서는 검고 깊은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가 받은 선물들 한 번 세어볼래?"

이서는 눈을 굴리며 한참을 받은 선물들을 말해보며 손가락을 접었다.

"엄마가 생각하기에는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오신 날이니까. 그 자체가 우리한테 선물인 거거든. 예전에 '슈퍼북'에서 크리스가 갖고 싶던 선물에 당첨됐는데 선물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친구에게 양보했던 거 기억나지?"

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엄마. 그럼 우리도 선물 못 받는 친구한테 선물을 줄까요? 나는 안 받아도 괜찮을 거 같아요."

내가 말하기도 전에 이서가 먼저 말을 해버렸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이서가 기특하고 예뻐서 안아주면서도 혹시 아이가 눈치를 본 걸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내 고민이 무색하게 이서는 별생각 없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만들기를 계속했다.


다음날 우리는 선물을 골라 이서 학교 입구에 있는 장난감 기부 상자로 갔다. 이서는 잠시 장난감을 안고 고민에 빠졌다. 나에게는 없는 장난감이고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 이서는 그냥 가지면 안 되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이서에게 장난감을 좀 더 구경할 시간을 줬다. 그리고 박스에 적힌 '8+'를 보여줬다. 만 8세부터 사용하는 장난감이다. 이서는 이제 막 다섯 살이 됐으니 아직은 이 장난감을 잘 사용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이서가 8살이 됐을 때는 또 새로운 것들이 있을 거라고 하니 흡, 하고 한 번 숨을 쉬고는 벌떡 일어나 기부 상자로 성큼성큼 간다. 기부 상자는 이서 키보다 훨씬 커서 내가 이서를 들어 올려줬다. 이서는 상자 안을 들여다봤다. 이미 이서 학교의 친구들이 넣어둔 선물들이 잔뜩이었다. 이서는 "우와, 선물이 엄청 많다!" 하더니 자신이 가져온 선물도 조심스레 넣었다. 나뿐이 아니라 많은 친구들이 장난감을 넣었다는 사실에 일종의 소속감과 뿌듯함을 느낀 얼굴이었다. 이한이도 보고 싶대서 안아 올려서 보여주는데 이서는 뒤에서 "이한아! 그건 우리 거 아니야. 다른 친구들 줄 거야."라고 아는 체도 한다.


나는 차로 달려온 아이들을 잠시 세웠다.

"오늘 이서는 모르는 친구에게 크리스마스의 사랑을 줬기 때문에 이제 정식으로 크리스마스 요정이 됐습니다. 요정이 됐기 때문에 작은 선물을 주겠습니다."

이서는 진짜 선물이 있냐며 한껏 기대했다. 나는 차 문을 열고 빨간 산타 모자 두 개를 꺼냈다(학교 준비물이었다. 호호). 이서와 이한이는 모자를 하나씩 나눠 쓰고 주차장 옆 나무 앞에 서서 사진도 찍고 한참을 즐겼다. 이서는 자신은 이제 요정이라며 집에서도 내내 모자를 쓰고 놀았다.


나는 산타를 믿지 않는 아이였다. 믿지 않았다기보다 산타는 이야기 속에 있다는 걸 알았다. 유치원에서 산타 분장을 한 체육 선생님이 나눠준 장난감이 내가 원하는 걸 알고 있던 엄마가 사준 거라는 것도 알았고 성탄절 아침에 산타가 다녀갔을까 궁금했던 날도 있었지만 나의 엄마와 아빠는 굳이 새로운 선물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산타가 머리맡에 선물을 두고 갔다고 말하는 또래들을 보면 그런 낭만을 지켜주는 엄마와 아빠가 있다는 게 조금 부럽기도 했다. 자라며 십 대 시절에는 크리스마스이브에 교회에서 하는 전야제 준비에 열성적이었다. 그때 나는 연극이든 춤이나 노래든 뭐든 친구들과 함께 몇 달이고 준비했다. 모여서 연습하고 어울리는 자체가 재밌어서 성탄의 의미는 조금 잊었었다. 전야제가 끝나면 집집마다 함께 돌며 성탄 찬양을 부르는 새벽송을 했다. 이것도 성탄의 소식을 알리며 찬양했던 천사들처럼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의미가 있었는데 그때는 마냥 즐거워서 했다. 우리 가족은 늘 성탄 전야제에 참석했는데 연애를 하던 시절 남편은 같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전야제에 오지 않았다. 나는 전야제를 마치고 카페에 있는 그를 잠시 만나러 갔다. 혼자 앉아 성경을 읽고 있는 그가 참으로 낭만이 없어 보였다. 남편은 여전히 낭만보다 의미와 사실이 중요한 사람이고 그는 아이들에게도 가짜 환상보다 진짜 이 날의 의미를 알려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어디선가 그런 글도 읽었다. 성탄 선물로 자녀에게 너무 좋은 선물을 주지 말아 달라는 당부였다. 선물을 받기 어려운 처지거나 가난해서 정말 작은 선물만 받을 수 있는 아이들에게는, 킥보드나 닌텐도 게임기나 컴퓨터 같은 것을 받았다는 아이들의 자랑을 들으면 마음에 의구심이 든다는 거였다. "산타는 왜 나에게는 양말을 줬을까? 나는 충분히 착한 아이가 아니었던 걸까?" 크리스마스는 사실 선물을 나누는 날도, 연인들의 이벤트 날도, 화려한 날도 아니다. 이 날은 한마디 말로도 온 세상을 만들고 사라지게도 할 수 있는 이가 그 피조물의 죄를 씻으려 이 땅에 온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사실 다른 모든 예쁘고 화려한 것은 그 본질을 흐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하룻밤 지낼 방이 없어 말구유에 그 몸을 처음 뉘었다. 유달리 큰 별 하나가 그 위를 지켰고 그 별을 보고 만왕의 왕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려 온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핼러윈 날 집을 지키며 아이들과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웠다. 그날 이후로 마주 보는 아파트 유리창에 크리스마스트리 불빛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창문에 달라붙어 다른 집의 트리를 보는 아이들에게 이 불빛의 의미를 말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이를 기념하는 거야. 그리고 우리도 세상의 빛이 되는 거야. 아직 순수한 아이들은 그저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빛냈다. 아이들도 앞으로 살며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 앞에 의심하게 될 테다.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그리고 왜 우리가 적게 가진 것도 나누며 살아야 하는지도 알게 되겠지.


여전히 내 책상 위에는 이서가 만들어준 포장지가 그대로 있다. 선물을 받지 못하는 친구를 생각했던 이서 마음을 지켜주려면 나는 어떤 엄마가 돼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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