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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지 Dec 08. 2018

2.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는 것들



지난여름 교회의 모임에서 남북 정상 회담에 대해 이야기하던 것이 이산가족 상봉으로, 전쟁을 겪은 세대의 고통과 그 이후의 성장, 통일에 대한 이야기, 베트남의 예시, 그리고 목원들의 군대 이야기로 이어졌다. 40대에 접어든 한 분은 최전방의 수색대에서 복무했다. 당시의 수색대는 복무 기간도 길뿐더러 한참 건강하고 단단한 나이의 인간 병기에 가까운 이들을 모아 극한 훈련을 했다. 맞기도 엄청 맞았고 강도 높은 훈련에 지금은 그에 대해 말하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교회에서도 군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셨다. 이후에 가장이 되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고는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팀에서 초등학생 아이가 지쳐 걷지 못하자 설악산에서 그를 업고 그 험한 길을 내려왔다고 했다. 늘 웃는 얼굴에 여러 실패도 경험해보고 지금에 와 열심히 다시 쌓아가는 이인데 그날 또 새로운 모습을 봤다. 우리 아빠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날은 그분의 딸이 함께 왔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딸은 우리가 그 아빠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홀로 거실의 소파에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하며 과자를 먹었다. 아빠가 딸을 불러 마지막 남은 옥수수를 권했다. 먹지 않겠다고 해서 아빠가 먹기 시작하자 다시 찾아와 옥수수를 먹고 싶다고 했다. 아빠가 한 입 먹은 옥수수를 주려 하자 딸은 먹던 것을 먹지 않겠다고 투정을 부렸다. 나는 조금 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살아온 시간의 어려움이 느껴지고 이겨낸 것들이 보여 감회가 새로웠는데, 딸에게는 그저 지나간 아빠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 애에게는 아빠가 헤쳐온 삶보다 지금 먹고 싶은 옥수수가 훨씬 중요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의 생각이 넓어져야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나도 그때는 아빠의 경험을 듣는 것이 지루했고, 어려움이 있어도 아빠는 당연히 참고 견딜 수 있는 거라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말하지 않던 것들을 아빠는 병원에 누워 조금씩 꺼냈다. 아직 힘이 있던 때, 아빠는 상현이에게 우리 가족이 지리산과 설악산에 오른 것을 이야기했다. 지리산의 천왕봉을 올랐다가 중반쯤 내려왔는데 해가 지기 시작했다. 나무 그늘에 하늘빛도 가려져 말 그대로 눈앞이 캄캄하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해가 지기 전에 내려오려 했기에 가져간 랜턴은 하나밖에 없었고, 어둡고 밤이슬이 내린 길에서 눈이 나쁜 엄마는 발목을 삐끗했다. 119에 연락했지만 정상에 더 큰 사고자가 있어 우리를 도우러 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아빠는 초강수를 뒀다. 중학생이던 병희에게 랜턴을 주고 앞서가며 길을 찾도록 했고, 나는 가운데, 자신은 엄마를 부축하며 맨 뒤에 섰다. 병희가 길을 찾은 뒤에 멈춰 서서 뒤로 빛을 비추면 우리는 그 빛이 비치는 만큼만 걸어갔다. 병희 뒤에 모두 모이면 다시 병희가 앞을 비춰 길을 찾고 먼저 가서 뒤를 비췄다. 그때 병희는 한참 사춘기로 아빠와 자주 부딪혔다. 아빠는 그날의 병희를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칭찬했다. 그렇게 한참이 걸려 아래에 내려온 뒤에 아빠는 우리를 한 곳에 세워두고 주차장까지 달렸다. 다시 차를 가져온 아빠는 차 안에서 우리를 모두 재우고 다시 집까지 운전을 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설악산에 올랐을 때에는 정상에서 하룻밤 자는 동안 예상보다 빨리 태풍이 왔다. 다음날 산장의 직원들은 위험하니 내려가지 말라고 말렸다. 하지만 우리는 휴가를 늘릴 수 없었다. 직원들은 아주 천천히, 함께 움직이라 당부했다. 우리는 비옷을 입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바위길이 많은 설악산에서 비에 젖은 바위를 밟고 내려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미끄러지지 않으려 힘을 주고 내려오니 온몸에 알이 배기고 비와 땀에 젖어 엉망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웃을 일을 찾는 사람들이라 즐거워서 경치를 보며 감탄하긴 했지만, 힘든 건 여전했다. 이번에도 차가 올라올 수 있는 곳에 도착하자 아빠는 우리를 비를 피하도록 처마 밑에 세워두고 주차장까지 달려 내려가 차를 갖고 우리를 데리러 왔다. 엄마와 병희가 잠들고 나는 운전하는 아빠를 위해 깨어있으려 했다. 반쯤 졸며 힘들지 않냐고 물으니 아빠는 괜찮다고 했다.


그동안 아빠는 우리와 그 기억들을 이야기할 때면 좋은 기억만 말했다. 어두워진 지리산을 내려올 때 중학생이었던 병희가 랜턴을 들고 앞서가며 얼마나 씩씩하게 잘해주었는지, 산장에서 자고 일어난 아침 불어닥친 태풍에 모두가 말리는데도 용감하게 함께 내려왔던 것, 비에 젖은 설악산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때 함께 먹은 라면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하지만 아빠는 이제 가장이 된 사위 앞에서 처음으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어둠 속에서, 또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기다리는 가족을 위해 아빠는 지친 몸으로 어둠과 비를 지나 막막함을 이겨내야 했다. 나는 몰랐다. 나는 아빠는 무섭지 않은 줄 알았다. 어둠도, 피로도. 가족을 위해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아빠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아빠는 그때 참 마음이 캄캄했다고 말했다. 너무 어두워 보이지 않고, 비를 맞으며 달리는 그 길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 없었다고 했다. 아빠가 말하는 동안 나도 그 자리에 같이 있었다. 하지만 아빠는 내가 아니라 상현이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막 가장이 된 사위에게.


상현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아빠는 괜찮았던 것이 아니라 그저 감당한 것이었다. 무섭고 걱정스러워도 우리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다시 안전한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이 아빠의 임무였다. 그것은 산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여정에서 그랬다. 그리고 아빠가 아픈 동안에도 그랬다. 아빠는 계속해서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과 빗속에서 달렸고, 그 '괜찮다'라는 말이 아빠의 건강을 망가지게 하고 더 헤쳤다. 어떤 때에는 아빠는 본인이 하고 싶은 것에 심취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왜인지 모르게 더더욱 일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에 집중했다. 아빠는 뭔가에 쫓기고 있었다. 아빠는 괜찮지 않았다.


아빠도 두려워했다. 아빠는 병원에서 계속해서 일지를 썼다. 일 년 전, 아빠의 첫 수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빠는 계속해서 노트를 폈다. 아빠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만들고 싶다고 적었다. 남은 시간이 적어 아빠가 해낼 수 없는 것들을 아쉬워했다. 엄마와 더 사랑하고 싶었고, 아들에게 알려줄 것들이 많았고, 딸이 해낼 것들을 기대했는데 그 모든 것을 함께하지 못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아빠 본인의 노력들이 사라지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나는 어느 날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는 지금 대표로 아픈 거라고. 우리 가족 안에 쌓였던 많은 고민과 괴로웠던 시간들이 쌓여 가장 강한 아빠가 대신 겪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겪게 해서 미안해. 아빠는 그 말을 듣고 나를 깊이 바라봤다. 우리는 마음이 하나로 합쳐지길 바랐지만 잘되지 않았던 때를 생각했다. 우리에게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를 갖고 나는 아빠를 살리고 싶었다. 아빠도 나도 그날 손을 잡고 조금 울었다. 몇 날이고 뒤척이던 아빠는 그날 깨지 않고 깊은 새벽까지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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