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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지 Dec 02. 2018

1. 아빠의 보디가드



내가 어렸을 때 미용실에는 대부분 여자밖에 없었다. 원장도 손님도 여자였다. 가끔 남자 손님이 앉아있으면 그렇게 불편해 보일 수가 없었다. 여자들이 많은 곳에 앉아 머리를 깎으려니 이발소 세대인 아빠도 미용실에 가는 것을 쑥스러워했다. 그래서 머리를 깎을 때가 되면 엄마가 같이 갈 수 있는지 꼭 물었다. 나는 여섯, 일곱 살 무렵이었는데 동생이 생기고 난 뒤에는 엄마가 갈 수 없었다. 엄마는 아빠에게 나를 데려가라고 했다. 아빠는 웃으면서 함께 가겠냐고 나에게 물었는데, 나는 꼭 같이 가야 하는지 되물었다. 엄마는 '가서 아빠 지켜줘'라고 말했다. 그럼 내가 보디가느냐고 물었는데 아빠랑 엄마는 웃으며 맞다고 했다. 아빠가 티를 안 내려 하지만 꽤나 쑥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고, 그래서 나는 아빠를 지켜주러 함께 가기로 했다.


우리는 복도식 아파트를 내려가 상가에 있는 미용실로 갔다. 미용실에 들어가면 아빠는 원장님에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원장님이 나를 보며 "딸내미가 같이왔네~"하면 나는 "보디가드로 온 거예요"라고 답했다. 그러면 아빠도, 원장님도 웃었다. 아빠는 쑥스러움을 이기려 더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익숙하게 소파에 앉았고, 아빠는 내 옆에 붙어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우리는 앞에 있는 큰 거울로 눈을 마주치고 웃기도 하고 아빠 손바닥에 내 손을 올려놓고 팡팡 튀기기도 했다. 순서가 되자 아빠는 일어나면서 나를 보고 "여기 앉아 있어:라고 말했다. 그 말은 꼭 내가 거기 있어야만 아빠가 괜찮을 것 같다는 뜻 같았다. 나는 아빠가 의자에 앉아 보자기 같은 밝은 천을 목에 두르고 앉는 것을 지켜봤다. 원장님은 아빠에게 나에 대해 물었고 둘은 거울로 뒤에 앉은 나를 보며 웃었다. 아빠는 나를 보면 되니 쑥스러울 일이 없었고 어린 나는 남는 게 시간이라 괜찮았다.

그 후로도 우리의 미용실 여정은 한동안 계속됐다. 아빠가 미용실에 간다고 하면 나는 자연스레 붙어갔다. 미용실에 들어서면 원장님은 나를 보고는 아빠에게 "보디가드 데려왔네요"라고 했다. 원장님은 늘 웃는 얼굴이었던 건 아니었는데, 쑥스러운 당사자인 아빠는 늘 멋쩍어서 웃었다. 원장님은 내가 자주 간다 해서 나에게 더 살갑게 대해주는 것은 아니엇다. 나도 낯가림이 심해서 그저 앉아있었고, 가끔 소파에 앉아 기다리는 손님이 많아지면 혼자 거기 앉기가 민망해져 아빠의 곁에 서서 귀나 목에 붙은 짧은 머리카락을 떼어주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어색했지만 잘 해냈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생이 되는 해에 우리는 다른 동네로 이사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빠는 곧잘 혼자서 미용실에 다녀오곤 했다. 퇴근길에 들렀다 오기도 했고 저녁밥을 먹은 뒤 미용실이 닫을까 다급하게 다녀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일부러 길어진 머리를 참다가 주말에 다녀오기도 했다.

나는 자라면서 가끔 미용실에 가는 아빠에게 보디가드가 필요하지 않냐고 웃으며 물었는데 아빠도 웃었다. 이제는 내가 원하면 같이 가도 된다고 했다. 그래서 몇 번은 같이 가기도 했다. 그러면 아빠는 꼭 나를 보디가드로 소개했다. 그때의 나는 일곱 살 때만큼 낯을 가리지는 않았다. 거울 앞에 앉은 아빠와 눈이 마주치면 나는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고 아빠는 씩 웃었다. 그러고 돌아올 때면 근처 슈퍼에 들러 아빠는 내가 좋아하는 새콤달콤을 사 주거나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나눠 먹기도 했다. 늘 아빠의 한 입이면 아이스크림의 반이 사라져 서러웠다.


사실 보디가드라 하면 아빠가 나를 위해 해 준 것이 훨씬 많다. 아빠는 언제든 어디든, 자다가도 싫은 소리 없이 데리러 와줬고 항상 약속한 시간보다 먼저 도착해 기다렸다. 버스에서 내릴 때면 정류장에 먼저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쁘지 않은 때에도 예쁘다고 해주며 내 편을 들어줬고 실수할 때도 잘할 수 있다며 용기를 줬다. 그런 아빠라서 나는 낯을 가리면서도 아빠가 멋쩍을 때면 나서곤 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남행열차와 은하철도 999 노래를 같이 부르고 함께 성가대도 서고 아빠의 길고 긴 마라톤도 기다렸다. 아빠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인생 처음으로 가꿨던 사업을 정리하고, 자신의 몸이 얼마나 망가졌는 지 느껴질 때 내 앞에서 눈물을 훔쳤다.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여전히 많고 같은 일을 내내 반복해도 지겹다 생각하지 않을 텐데. 그런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아빠의 보디가드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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