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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지 Jan 11. 2019

10. 적게 가진 우리 (下)




초등학생 때 나는 교회 수련회에 갔다. 별로 많은 기억이 있지는 않은데 집 떠나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종종 아빠와 엄마에게 배가 아프다고 꾀병을 부리며 집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쉽게 속지 않았다. 한 번은 계곡이 있는 기도원에서 수련회를 했다. 반별로 흩어져서 활동을 하는 시간이었는데 우리 반은 계곡 옆의 간이 테이블에 앉았다. 위에는 파란색 비닐 천막이 쳐져 있었다. 반에는 여자애들밖에 없어서 우리는 엄청나게 웃고 떠들었다. 한참 후에 선생님은 우리에게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하자고 했다. 나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나는 어떤 기도를 해야 할까. 그리고 결정했다. 지금 제가 겪는 어려움을 병희는 자라면서 겪지 않게 해 주세요.


동생이 힘들지 않길 바라는 누나의 마음이기도 했지만 정작 그 애는 가진 것이 적어 힘들어하지 않았다. 가진 것에 만족했고 감사했고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욕심내지 않았다. 그러니 그 기도는 사실 상황이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나를 위한 기도였다. 그 후로도 나의 기도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아빠의 사업이 어려워지고 시골집으로 이사 가고, 오랜 시간 버스를 기다리며 길 위에서 시간을 버리는 동안 나는 계속 자랐고 늘 생각했다. 병희가 내 나이쯤 되면 좀 달라졌으면 좋겠다고.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다. 시골 살이를 시작하며 차는 낡은 것이어도 두 대가 되었고 여전히 동네 버스는 두 시간 사십 분을 기다려야 하지만 시내의 버스는 개편되었다. 아빠는 그 사이에 여러 번 직업을 바꿨다. 넓은 인맥을 자랑하며 보험왕을 꿈꾸기도 했고 몇 년간은 농부가 되기도 했다. 그 후에는 다른 지역에 새로운 직장을 구해 집을 자주 떠나 있었다. 그리고 늘 시인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빠는 새해가 될 때마다 올 해는 더 좋아질 거라고 씩씩하게 외쳤지만 그렇지는 못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엄마는 계속해서 여러 곳을 다니며 일했다. 나는 졸업을 앞두고 일을 시작하며 학자금을 갚기 시작했다. 병희는 대학생이 되었다.


처음으로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나는 울었다. 세상이 떠나갈 것처럼 울었다. 나는 빚지는 게 너무 싫었다. 아빠와 엄마는 불어난 빚을 안고 이 시골집으로 왔다. 나는 빚이 어떻게 생활을 좀 먹는지 조금은 알고 있었다. 아직 학생인 내가 빚을 갖고 스무 살을 시작해야 한다는 게 무서워서 울었다. 나는 잘 참으며 지내다가도 가끔씩 그렇게 못되게 굴었다. 어린 나는 물려 입은 교복도 참았고 한 시간 반을 기다려 버스를 타고 내릴 동네에서 두 시간 사십 분에 한 대가 오는 버스를 기다려 집으로 오는 것도 참았다. 시험기간마다 사고 싶었던 문제집도 참았고 하고 싶었던 음악공부를 하지 못 하게 된 것도 참았다. 하지만 스무 살의 나에게 '빚'은 너무 거대해 보였다.


아빠는 모두 갚아줄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잘 될 거라고. 아빠가 잘 될 거라고 강아지 같은 눈으로 진심을 다해 말할 때마다 나는 내가 품었던 마음에 괴로워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빠,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돈에 관련된 아빠의 모든 약속이 그랬듯 그 약속도 결국은 잘 되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마지막 밤, 아빠의 마지막 배웅을 함께하겠다고 그곳에서 잠을 청한 아빠의 친구들이 있었다. 아빠의 고등학생 시절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함께 살아온 이들이었다. 한 분이 식당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그분의 어깨를 두드렸다. 방석을 깔고 누워서 주무시라고 하자 이대로가 좋다고 답했다. 그분은 딸뻘인 나에게 존대를 하셨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말 하지 않아도 마음은 모두 같았다.

"막막해하던 표정이 생생합니다."

한참의 침묵 후 그가 말했다.

"그땐 나도 너무 힘들어서 도와줄 수가 없었어요. 방법이 없었지. 낙호도 방법이 없어 괴로운 표정이었는데."

그래. 아빠는 괴로웠을 거다. 나는 생각했다. 아빠는 언제나 그 괴로움을 잘 될 거라는 말로 감쌌다.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짐을 정리하는데 동생이 아빠의 지갑을 찾았다. 잠시 열어 뒤적이더니 누나 이것 봐, 하면서 눈물을 터뜨렸다. 지갑에서 꺼낸 쪽지는 너무 오랫동안 지갑 안에 눌려있어서 접힌 부분은 누렇게 닳아 있었다. 2008년 아빠의 계획들이었다. 그 해에 이루고 싶은 것부터 그 후로 오 년 안에, 십 년 안에 이루고 싶은 장기 계획까지 많은 것이 적혀있었다. 시골집으로 온 지 오 년이 되던 때였다. 아빠는 이 낡은 시골집을 늘 따뜻하고 예쁜 집으로 새로 짓고 싶어 했다. 철인 삼종 경기에 도전하고 싶었고 엄마와의 세계여행을 꿈꿨다. 그리고 더 나은 시인이 되기를 꿈꿨다. 그리고 '영지 대학 자금 모으기'가 적혀있었다.


나는 얼른 다시 접어 아빠의 지갑에 넣었다. 성공한 것은 거의 없었다. 내가 가진 것이 적음을 부끄러워했던 날들을 생각했다. 아빠가 해결하지 못한 가난을 견디는 엄마와 동생을 측은히 여겼다. 아빠는 그 안에서 계속 시들고 있었다.


몇 년 간 학자금 대출을 갚았다. 대출 잔액을 알리는 고지서가 날아올 때마다 아빠는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고맙다, 고마워, 하고 말했다. 나는 내가 공부한 것 내가 갚는데 아빠가 왜 고맙냐고 말했다. 사실이었다. 하필 나는 사립대학에 갔고 내 욕심껏 여러 전공을 배우느라 학기마다 장학금의 기복이 심했다. 아빠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건 나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세상의 문제였다. 그때마다 아빠는 촉촉한 눈으로 나를 봤고, 그러면 나는 왜 이렇게 수완이 없어 돈을 많이 벌지 못하나 슬픈 마음이 들었다. 결혼 후에는 상현이도 함께했고 아빠가 돌아가신 뒤 엄마가 보태준 돈도 있었다. 다시 학자금을 받게 되는 때가 된다면 나는 울지 않고 이렇게 생각하고 싶다. 후우. 앞으로 나는 최선을 다할 거다. 돈이 뭐라고 배우고 싶은 것도 못 배울까.


아빠는 내가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비슷한 말을 했다. 아빠가 네 결혼에는 도와주고 싶었는데, 아빠는 딱 한 번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처음부터 부모님들에게 받지 않을 마음이었기에 아무것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이번엔 내가 말했다. 괜찮아 아빠. 우리 잘할 수 있어. 아빠는 그런 나를 보며 더 이상 안쓰러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점점 단단해지고 있었다. 전세는 점점 찾기 어려워졌지만 우리는 시골집을 찾았을 때처럼 감사하게도 형편에 맞는 신혼집을 만날 수 있었다. 둘이 살기에 충분하고 따뜻하고, 작고 소박한 것들로 가득한 우리 집.


적게 가진 것은 사실 그리 불편하지 않다. 앞으로도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을 먹고 마시고 입고 도울 거다. 그리고 나의 가진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을 거다. 엄마도, 병희도, 그리고 남편도 필요와 사치를 가려가며 적게 가진 것이 얼마나 가볍고 쉬운지 알고 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몰랐을 마음들을 우리는 깊이 간직하고 있다. 부족했기 때문에 더 사랑했던 날들, 더 치열하고 괴로웠던 날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아무도 내쫓지 못할 이 집이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아빠가 떠난 후에 엄마는 자주 말했다.


몇 달 전 나는 학자금 대출을 모두 갚았다. 잔액이 0이 되는 순간 나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엄마와 상현이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창문을 조금 열고 작은 목소리로 아빠, 하고 불렀다. 아빠의 목록이 하나씩 지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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