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지 Jan 11. 2019

11. 아빠의 즐거움과 자랑



아빠가 내 어린 시절에 대해 얘기하면 빠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다. 세 살 무렵 아직 발음이 어눌하던 아가 시절의 내 어록이다. 나는 아빠 무릎에 거만한 자세로 앉아 "애로라~"하고 말했다. 그건 '여봐라'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잠시 나를 기다려달라며 "가짬만"이라고 말했다. 그건 '잠깐만'이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김장돼"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긴장돼'라는 뜻이었다. 긴장된다는 것이 어떤 건지 알고 말한 것 같지는 않다. 어린애가 그런 단어를 쓴다는 자체가 부모에게는 신기하고 재밌는 경험이었다. 나는 만 세 살이 되기 전, 한글을 미처 떼지도 못한 때에 크리스마스 인사말을 하기도 했다. 그때 나는 '메리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서 '메리 크마스'라고 말했다. 그때 촬영한 영상이 비디오로 남아있었는데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던 때에는 종종 보곤 했다.  아빠는 그 시절의 내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아주 많이 말했는데, 그렇게 반복해도 지치지 않고 언제나 큰 목소리로 온 몸을 다 흔들며 말했다.


어릴 때 목청이 좋아 앞에서 노래를 하는 때도 많았는데 밥 달라고 부리를 벌리는 제비 새끼처럼 입을 쫙 벌리며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불렀다고 한다. 내가 즐겨 불렀던 찬양은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였다.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갈 때면 우리 가족은 열심히 노래를 불렀는데, 아빠와 내가 함께 좋아했던 노래는 '은하철도 999'의 주제곡이었다.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였는데, 나는 꽤나 비극적인 감성을 갖고 있었어서 이런 단조의 노래를 좋아했다. 그게 어떤 음악들이냐면 세일러문 주제곡이나 이누야샤 주제곡 같은 것들이다.


어른들 모임에서 갑자기 박수를 받아 나간 자리에서도 나 때문에 신나서 웃는 아빠 옆에서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함께 철수와 메텔을 노래했다. 아빠는 허스키한 목소리에 음을 꺾는 뽕삘(?)을 갖고 있었는데, 나는 아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극동방송 어린이 합창단의 오디션에서는 목소리가 너무 허스키하다는 평을 받으며 장렬히 탈락했다. 그러나 합창단 탈락은 나를 좌절시킬 수 없었다. 그 후로도 우리는 온 가족이 피아노에 모여 큰 목소리로 다 같이 화음을 넣었다. 아빠와 엄마의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나는 집에서 매일 노래를 불렀고 교회나 학교에서 노래하는 일엔 빠지지 않으며 즐거운 노래의 세월을 보냈다.


아빠는 내가 쓴 글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다른 이에게 내 글을 보여주는 것이 부끄러워 몸이 배배 꼬이는 사람이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두 번째 학기에 필수로 들어야 하는 인문학 수업이 있었다. 그 수업의 과제로 스스로 주제를 정해 소논문을 쓰게 됐다. 나는 진짜 논문을 한 편 읽으며 논문이 어떻게 생겨야 논문처럼 보이는지를 연구했다. 그리고 눈으로 보기에 논문처럼 보이도록 글을 썼다. 그리고 나를 믿을 수 없어 아빠와 엄마에게 보여주며 확인을 받았다. 엄마는 언제나 그렇듯 한 번 딱 읽은 뒤 시원하게 잘 쓴 것과 고칠 것을 말해줬다. 아빠는 내 과제 글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그리고 그 진실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영지야. 정말 잘 썼다." 나는 아빠의 말이 큰 힘이 됐고 정말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그 후로 논문이 아닌, 진짜 나의 '이야기'를 제대로 완성하지 못했다.


아빠는 그 후로 우리 집의 시인에서 동네의 시인으로, 그리고 도시의 시인이 되었고 몇 년이 흘러 진짜 어나더 레벨의 시인이 되었다. 그때에도 아빠는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하게 될 때마다 '제 딸입니다. 저보다 글을 훨씬 더 잘 써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아빠 뒤로 숨어서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예의가 아니라 한쪽 어깨만 아빠 뒤로 숨겼다.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아빠보다 잘 쓸 수 없었다. 왜냐면 아빠만큼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았고 아빠처럼 용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빠는 자신의 과거와 나의 미래를 생각하며 그렇게 말했을 거다. 그 말 때문에 나는 조금이라도 더 노력하게 됐다. 조금이라도 더 쓰게 됐다.


아빠가 엄마에게 쏟아낸 수많은 립서비스는 셀 수도 없다. 아빠는 숨 쉬듯 엄마에게 멘트를 던지곤 했다. 아빠는 늘 우리에게 '엄마 너무 예쁘지 않니'라며 우리를 세뇌시켰다. 세수를 안 하고 머리를 안 감아도 예쁘다며 자꾸만 엄마의 습관을 망쳤다. 알고 보니 이건 비단 우리에게뿐만이 아니었다. 막내 외삼촌은 결혼 전에 외숙모에게 자신의 누나, 그러니까 우리 엄마가 전인화를 닮았다고 설명했단다. 알고 보니 그것도 아빠가 처남을 세뇌시킨 결과였다고 외숙모가 말해줬다. 아빠는 밥을 먹을 때면 고봉밥을 두 공기씩 와구와구 먹으며 엄마가 해준 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정말로 다른 식당에 가면 맛이 없다며 밥을 한 공기만 먹고 말았다.


아빠는 병원에 누워있는 동안도 엄마에게 수시로 멘트를 날렸다.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던 날, 아빠는 나를 보며 입을 움직여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나는 잘 들리지 않아 귀를 가까이 댔고 아빠는 "엄마 예쁘다고"라고 말했다. 아빠를 걱정하고 있던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웃기고 조금 짜증났다. 아빠와 마주 앉아 궁금해하는 엄마에게 "엄마 예쁘대. 멘트 날리는 거 보니 괜찮구먼."하고 알려줬다. 우리는 다 웃었다. 아빠는 그렇게 우리를 안심시켰다.


병희가 막 초등학교에 들어갔던 때, 병희를 위해 온 가족이 과학 축제에 간 적이 있었다.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우유 빨리 마시기 대회'가 열렸는데, 우유를 좋아했던 병희도 도전했다. 아이들 앞의 테이블에는 빨대가 꽂힌 우유갑이 놓여있었다. 셋, 둘, 하나, 사회자가 외치자 일렬로 선 아이들이 빨대를 입에 물었다. 잠시 빨대로 마시던 병희는 갑자기 빨대를 내던졌다. 우유갑 입구를 열고 벌컥벌컥 마셨다. 당연히 병희가 일등이었다. 대회가 끝나고 우리에게 돌아온 병희는 빨대가 답답해서 참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아빠는 병희의 기지에 감탄하며 집에 오는 내내 또 들뜬 표정으로 한참을 이야기했다.


악보를 볼 줄 몰랐던 병희가 선생님 손가락을 보고 클래식 기타로 첫 곡을 완성했을 때는 우리는 집에서 몇 번이나 병희의 리사이틀 관객으로 앉아 박수를 쳤다. 병희가 처음으로 찬양팀에서 일렉 기타를 쳤던 것, 아빠와 장기를 두면서 처음으로 이겼던 순간, 시골집 마당에 쌓인 눈을 처음으로 아빠를 도와 치웠던 것, 초등학생이었던 병희가 아빠와 함께 10km를 완주한 것, 그리고 그 마라톤에서 최연소로 가장 빨리 완주한 사람이 되어 상장을 받은 것, 달리기가 느린 우리 가족 중에 병희가 유일하게 계주 선수로 뽑혀 1등을 한 것. 아빠는 그런 것들을 질리지도 않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즐겁게 말했다.


공부에 흥미가 없고 엉킨 관계로 병희는 상처가 많았다. 하지만 언제나 집으로 돌아오면 작은 것으로 힘차게  웃어주고 큰 소리로 칭찬해주는 아빠가 있었다. 아빠는 병희가 방에서 기타를 치면 문을 열고 들어와 한참을 귀 기울였다. 그래서 병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었다. 그 애는 기타를 처음 배웠던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찬양단의 기타리스트로 지냈다. 병희는 그렇게 집에서 성대모사의 달인이 되었다가 우리 중 유일한 계주 주자가 되었다가 우리 가족 제일의 기타리스트가 되었다가 장기왕이 되었다가 운전왕이 되었다가,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우리는 아빠의 그런 이야기가 조금 지겹고 항상 재밌었다.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빠의 즐거움이고 자랑이었다.

이 글을 아빠에게 보여주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10. 적게 가진 우리 (下)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