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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지 Apr 17. 2019

17. 고통을 참는 자




아빠는 아주 건강했다. 쉽게 아픈 법이 없었다. 엄마와 나와 병희가 서로 감기를 옮아 일주일을 넘게 아파도 아빠는 끄떡없었다. 아주 가끔 감기 기운이 오면 몸이 으슬으슬하다며 얼굴을 찌푸리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구구구 소리를 냈다. 본인도 아픈 것이 어색한 듯 아픈 티를 제대로 낼 줄 몰랐다. 그 소리는 꼭 어린애가 일부러 엄살을 부리는 것 같아서 엄마는 나에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빠의 이마를 짚어보기도 하고 이불을 더 덮어줬다. 좀처럼 없는 일이라 아빠는 조금 더 아프고 싶은 것 같기도 했는데, 아빠의 회복 속도는 엄청나서 우리가 일주일 아팠던 감기도 하루면 괜찮아져 그토록 아팠던 어제에 서로가 민망할 정도였다.


한 번은 그런 아빠가 꽤 오랫동안 아픈 적이 있었다. 아빠는 이불을 꽁꽁 싸매고 누워 계속 아구구구 소리를 냈다. 증세가 몸살 같아 해열진통제를 먹고 아무리 쉬어도 쉽게 낫지 않았다. 아빠는 병원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아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는 쯔쯔가무시인 것 같다고 했다. 통증이 엄청난 병인데 아빠는 온몸으로 견뎌냈던 거였다. 아빠의 통증은 그 후로도 며칠이나 더 이어졌다.


아빠는 신장암이 밝혀지고 난 뒤, 한쪽 신장을 떼어내야 했다. 피가 많이 몰리는 장기여서 그냥 떼어내다가는 출혈이 너무 커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수술 전 날, 아빠는 미리 신장을 괴사시키는 시술을 받았다. 시술을 받는 중에 마취제가 부족해져 보충하는 동안 아빠는 적나라한 고통에 던져졌다. 아빠는 이를 악물고 장기가 죽어가는 괴로움을 수술 침대를 두 손으로 붙잡고 긁으며 견뎌냈다고 한다.


더 끔찍했던 건 시술 후의 통증이었다. 시술을 마치고 돌아온 아빠는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 시술로 오른쪽 신장으로 들어가는 혈관을 모두 막아둔 상태였다. 살아있는 아빠의 몸 안에서 장기가 빠르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 통증은 곁에서 지켜본 나도 내가 경험한 것이 아니어서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아빠는 계속해서 신음했다. 곁에서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던 엄마는 간호사에게 통증의 정도를 물었다. 밤새 아이를 낳는 진통이 이어지는 고통이라고 했다. 우리를 낳은 엄마는 그것이 어떤 고통인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침대 머리맡의 버튼을 누르면 마약성 진통제가 몸 안으로 들어갔지만, 그 약도 통증을 멈추는 건 십 분을 넘기지 못했다.


그렇게 아빠는 밤새 아팠고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아침이 왔다. 밤새 시간이 흐르며 아빠의 오른쪽 신장은 정말로 죽었고 통증도 잦아들었다. 통증은 이겨냈지만 아빠는 완전히 지쳐있었다. 아빠는 진이 빠져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태로 수술실로 향했다.


수술 후에는 또 다른 통증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장을 빼내느라 갈랐던 배의 상처가 나을 때까지는 복통과 피부가 따갑고 간지러운 것을 견뎌야 했다. 아빠는 장기를 괴사시키는 고통을 겪고 나니 수술 후 장기가 사라진 것과 흉터에서 오는 통증은 별 것 아니라고 했다. 절대 별 것 아닌 통증은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이번에도 간호사는 통증이 심하면 머리맡의 버튼을 누르라고 했다. 하지만 아빠는 누르지 않았다. 그리고 많이 웃었다.


한 달이 지나 수술 흉터도 회복됐고 아빠는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동시에 자신의 책을 내고 싶어 했는데 한자에 관련된 에세이였다. 자주 쓰이는 성어나 문장들에 쓰인 한자와 그 배경을 설명하는 것이었는데 수술 전에 이미 원고는 완성돼있었다. 아빠는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다. 대부분 돌아오는 답은 아빠가 한문의 전문가 이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알려진 사람도 아니어서 출간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아빠는 멈추지 않았다. 아빠는 쫓기는 사람처럼 빨리 뭔가를 만들어내고 싶어 했다. 자신이 그 분야에서 가장 빠르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자격증이었다. 아빠는 지도사 자격증의 자격 요건을 맞추기 위해 먼저 1급을 땄다. 그리고 지도사 자격증을 땄다. 그다음은 특급이었다. 그동안 아빠는 이면지 뭉치를 빽빽하게 채우며 잠을 줄였다.


아빠는 새벽까지 깨어 공부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일곱 시면 차를 몰고 한 시간 거리의 회사로 출근했다. 저녁 여덟 시가 넘어 집에 도착했고 다시 새벽까지 공부했다. 엄마가 화를 내고 말려도 소용없었다. 아빠는 정말로 쫓기고 있었다. 자신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나의 친조부모는 혈관 질환으로 노년에 몸이 불편해지셨었는데, 아빠도 나이가 들며 고혈압이 생겼다. 심한 수준은 아니기도 했고 젊어서 워낙 건강했던 탓에 아빠는 자신이 이제 젊지 않으며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잘 몰랐다. 하지만 아빠는 가끔씩 두통에 시달렸다. 혈압이 높아졌으니 조심하라고, 일찍 자라고 아무리 말려도 시와 한문을 공부한다고 새벽까지 작은 글씨에 집중하며 글을 읽었다. 잠을 적게 잤고 오십 대 후반을 지나는 나이에 새롭게 얻게 된 직장에서 인정받으려 일에 집중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아빠의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빠는 입을 벌리고 거실로 나와 혀가 잘 움직이지 않는다고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다. 쉬어야 된다고 소리를 지르는 나와 엄마 앞에 그 날 아빠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한 숨 자고 일어나도 계속 돌아오지 않으면 병원에 가자고 했다. 암이 번져 문제를 일으킨 것은 아닌지 온 가족이 밤새 고민했다. 아침이 되어 아빠는 괜찮다며 다시 출근하려 차에 올랐다. 하지만 운전을 하면서 점점 스스로 안 되겠다 느꼈다. 아빠는 차를 돌려 충대 병원으로 향했다.


검사 결과는 뇌졸중. 출근해서 아빠의 소식을 기다리던 나는 병희의 전화를 받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암이 뇌나 혀에 전이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여러 번 혈관이 터졌던 흔적이 남아있다고 했다. 아빠가 가끔씩 겪던 두통은 정말 심각할 수도 있었던 뇌졸중의 증상이었던 거다. 이번에는 아주 중요한 신경을 조금 빗겨 위험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암과 싸워보기도 전에 죽을 뻔했다. 그날 아빠는 중환자실에 누웠다. 중환자실에는 정해진 시간에 한 명만 들어갈 수 있어서 엄마와 병희와 나는 번갈아 들어가 아빠를 혼냈다. 그러게 몸도 아픈 사람이 그렇게 몸을 혹사시켜서야 되겠냐고. 다시는 우리 놀라게 하지 말라고. 아빠는 무안하고 미안해서 웃었다.


아빠가 떠난 뒤 아빠의 대학 친구들은 밤새 장례식장에서 아침을 기다렸다. 한 친구는 엄마에게 말했다. 낙호가 아픈 걸 잘 참지 않더냐고. 엄마는 신장을 괴사시키던 밤 앓던 아빠를 생각했다. 암이 번져 피곤하고 아파도 참고 일하던 아빠를 생각했다. 이미 약해진 몸에 독한 항암약과 방사선 치료 때문에 거품을 토하면서도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를 않던 아빠를 생각했다. 아빠는 늘 참아왔다. 엄마는 맞다고 말했고,


"낙호는 옛날부터 그래. 잘 참아요."

아빠의 친구가 답했다.


엄마는 그가 엄마보다 아빠를 더 잘 알더라고 말했다. 엄마는 여러 번 이 이야기를 했다. 하기사 아빠가 떠난 뒤 엄마는 모든 이야기를 몇 번씩 했다. 아쉬워서였다. 어떤 때는 아빠의 아구구구 소리에 엄살이라 생각한 때도 있었다. 엄마는 본인이 잘 몰라줘서 나빠진 것은 아닐까, 더 강하게 말리고 쉬라고 할걸, 그 약을 먹지 말라고 할걸, 좀 더 빨리 억지로라도 병원에 데려갈걸, 수많은 것들을 후회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마다 말했다. 그건 엄마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빠를 위해 아침마다 면역력에 도움이 될 음료와 간식을 쌌고 매일 새로운 음식을 시도했다. 엄마는 일을 쉬지 않고 적게 자는 아빠를 말리다 지쳐 화를 내며 아빠를 걱정했다. 아빠가 병원에 있던 마지막 한 달은 내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아빠의 작은 소리에도 반응했다. 엄마는 아빠를 위해 철인이 됐다. 그러니까 엄마가 더 잘했어야 한다고 후회하는 것들은 결과론적인 것이었다. 엄마의 과정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가 젊었을 때부터 잘 참았다는 사실은 우리를 아프게 했다. 어쩌면 젊었을 때부터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서울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이미 성인이 된 누나와 단 둘이 서울에서 십대 시절을 보내며 부모의 보호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넷이나 되는 아들 중 세 번째 아들. 어릴 때 똑똑했던 것에 비해 가장 가난하고 존재감 없던 아들. 할머니는 아빠가 군대에 입대하는 날까지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빠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들은 아빠를 좋아했지만 아빠가 아픈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건 아빠에게 그럴 기회가 없었고, 그래서 방법을 몰랐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아빠는 외로움을 견디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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