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 아침.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아쉬움을(어쩌면 돌아가면 바로 출근이라는 것 때문에 슬픈 것일지도) 달래기 위해 아껴두었던 조토의 종탑에 올랐다. 요즘엔 두오모 통합권이라고 해서 인터넷으로 미리 티켓을 예매하고 종탑이나 두오모에 오르는 시간을 미리 지정할 수 있다. 이른 아침부터 입장권 사는 줄이 서기 시작하는 걸 보면서 조금 부지런을 떨어 예약해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좁은 공간을 줄지어 오르고 맞은편에 사람이 내려오면 벽에 붙어 길을 비켜준다. 그런 일련의 과정 속에 등산객 사이의 유대감과 비슷한 감정이 생겨난다. 숨이 가쁘고 다리가 점점 무거워져 온다.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조금만 더 힘내라고 응원해준다. 414개의 계단을 올라 꼭대기에 도착하니 아래에서 목이 아프도록 올려다보았던 두오모의 붉은 쿠폴라가 시선 아래에 있다. 드디어 팔각 돔의 완전한 실루엣을 감상할 기회다. 너무나 거대해서 압도되는 붉은 돔과 붉은 지붕의 건물이 빼곡한 피렌체 집들의 전경이 아름답다.
브루넬레스키가 만든 이 팔각의 돔 기둥은 당시의 건축 재료와 기술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혁신적인 일이었다는 사실보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두 주인공이 10년 뒤 쿠폴라 위에서 만나기로 했던 약속이 먼저 떠오른다. (소설의 줄거리라든가 결말이라든가 이런 것은 전혀 기억나지 않고 그 약속만 기억이 난다. 사람의 기억력이란 참 종잡을 수가 없다.) ‘서른 살 생일에 어디서 만나자’ 같은 기약 없는 약속을 해볼걸 그랬다 싶었다. 그게 지켜지든 아니든.
종탑에서 내려와 두오모가 보이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아침 식사를 했다. 크로와상 사이에 치즈와 토마토를 넣으니 이건 아침운동 뒤 허기 때문이 아니라 맛있을 수밖에 없는 조합이다. 진한 커피까지 곁들이니 깔끔한 식사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치즈와 에스프레소는 떠나야 하는 여행자의 미련을 부추기는 강력한 요소중 하나다.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은 10여 년 전 천국의 문을 본 것만 기억에 남아있어 내부도 둘러보기로 했다. 들어서자마자 황금색이 화려한 천장화에 시선을 빼앗겼다. 글을 몰랐던 신자들을 위해 성서의 내용이 정말 자세히 그려져 있는 성당의 성화를 보면 그 세밀함에 항상 놀라게 된다. 천장의 첨단부가 뚫려있어 자연광이 들어오는데 목을 가득 뒤로 젖혀 오래도록 쳐다보고 있으면 내가 그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금 내가 받는 압도감이 이 정도이니 당시 사람들이 이 세례당에 처음 들어왔을 때 느꼈을 경외감이 어땠을지 짐작해 본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Santa Maria del Fiore)은 이름 그대로 피렌체의 꽃이라 할만한 건물이다. 흰색, 녹색, 분홍색의 대리석으로 지어져 정말 꽃처럼 아름답다. 그리고 웅장하다. 불확실한 20대 청춘이 10년 뒤 만남을 약속할 만큼. 언제고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아름다움을 꽃피우고 있을 완벽한 건축물이다. (쏟아지는 관광객들로 쉽게 지칠 수 있으니, 돔에는 이른 아침에 오르는 것이 좋겠다.)
대성당 천장화를 멀리서 바라보며 '다음에 피렌체에 오게 된다면 쿠폴라에 올라야겠다'라고 생각했다. 10년 뒤쯤이면 다시 한번 올 수 있지 않을까? (그곳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준페이는 없지만) 기약 없는 약속을 하며 이제는 정말 피렌체를, 이탈리아를 떠나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