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도심으로 들어가기 전 가까운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었다. 기름을 가득 채워서 반납하게 되어있는데 대체 왜 [가득] 버튼이 없단 말인가! 기름이 어느 정도 들어가는지에 대한 감이 전혀 없는지라 일단 10유로를 주유했더니 아직 한 칸 아래다. 그다음 단위는 5유로인데 돌려받지도 못할 돈을 넣고 반도 안 넣은 것 같은데 (내 이럴 줄 알았지) 기름이 가득 찼단다. ‘이렇게 돌려주지 않는 돈만 해도 꽤 쏠쏠할지도?’ 싶으면서 조금 억한 심정이 생긴다.
분명 [가득] 버튼도 만들 수 있고 현금 반환 기능도 탑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선지불과 해당량의 기름을 주입하는 기능밖에 없는 주유기가 원망스럽다. 어떤 분야에서건 조금 더 편하게 조금 더 빠르게를 추구하는 한국의 생활에 익숙해진 나는 쉽게 불편함을 느낀다. (편하고 빠름이 결국 수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겠지만) 역시 나는 잘 적응된 소비 원숭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ZTL(Zona a traffico limitato, 법적으로 정해 놓은 교통 제한 구역)에 덜컥 들어가 단속카메라에 찍히는 불상사 없이 차를 제대로 반납하려면 ‘다리를 건너 좌회전! 좌회전!’을 되뇌며 피렌체에 도착했다. 갑자기 늘어난 차와 자전거에 조금 놀랐지만 ‘성공적인’ 좌회전으로 렌터카 차고에 잘 도착했다. 풀커버 보험 차량이어서 그런지 별다른 확인 없이 차키만 넘겨주고 반납은 쉽게 끝났다. 숙소로 가는 길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며칠 만에 끄는 캐리어의 무게가 새삼 느껴진다. 이래서 부모님과 떠나는 여행에는 렌터카가 필수구나 생각했다.
숙소에 도착해서 2층에서 내려오는 직원을 본 순간 예매 사이트 후기에서 ‘방이 넓고 깔끔해요’ ‘식당은 없지만 커피 캡슐과 과자를 줘요’ 같은 이야기보다 ‘직원이 훈남’이라는 후기가 넘쳐났는지 알 수 있었다. 환영 인사를 하며 내려와서는 무심하게 무거운 캐리어를 번쩍 들어 방으로 옮겨 주는데 ‘비행기 표 취소하고 피렌체에 정착할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17세기 건물에 운영 중인 [Novella House]는 천장화가 인상적이고 앤티크 가구는 가져가고 싶을 만큼 멋있었다. (구색 갖추기 용의 호텔가구가 아니었다.) 가장 큰 장점은 (훈남 직원…흠흠...이 아니라) 넓은 침실과 안락한 거실이 따로 있다는 점이다. 아침식사는 주지 않지만 노랗게 칠한 회벽이 아름다운 거실에서 커피 한잔을 즐길 수 있도록 커피 캡슐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겨준다. 달달한 과자로 아페리티프(식전 술은 도수가 너무 높은 관계로)를 대신하고 피렌체의 저녁거리를 누비러 나간다.
숙소에서 가까운 산타마리아 노벨라 약국(Officina Profumo-Farmaceutica di Santa Maria Novella Firenze)에 들렀다. 수도원에서 만든 역사가 있는 화장품이라는 정도만 알고 방문했는데 건물 자체를 문화재로 지정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고풍스러운 진열장 안에 제품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는데 이질적이면서도 잘 어우러지는 것 같기도 한 묘한 느낌이다. 화장품보다는 진열장과 천장화에 사로잡혀 관광하듯 둘러보면 티룸도 있고 (다음에 들린다면 마셔보고 싶다), 허브로 만든 연고 같은 것도 여전히 팔고 있다. 화장품을 사지 않아도 한 번쯤은 들려볼 만하다.
한 명의 직원이 여러 명의 고객을 상대하기 위함인지 섹션별로 담당 직원은 정해진 위치에 서있고 원하는 제품을 이야기하면 설명과 함께 테스트를 해준다. 구매할 제품을 결정하면 카드에 제품 정보를 넣어주고 다른 섹션에 가서 물건을 고를 때 그 카드를 내면 제품 정보를 추가로 넣어준다. 쇼핑을 마치고 나면 한 줄로 줄을 서서 계산을 기다리는데 줄이 제법 길다. 순서가 되어 카드를 건네주면 제품을 확인하며 챙겨주고 계산을 하는 시스템이다.
전통이 담긴 공간을 그대로 사용해 제품의 역사와 효능을 상기시키는 효과적인 디스플레이를 하면서 물건을 고르고 계산하는 과정은 최소 투자로 최대 효율을 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탈리아는 (로마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고 그 유적을 지키기 위해 불편함은 기꺼이 감수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천성이 인생을 즐기는 일이 더 중요하다 생각해서 그런 것일지는 몰라도) 낮에 기름을 넣었던 주유소 기계가 기꺼이 감수하는 불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산타마리아 노벨라의 똑똑한 시스템에 꽤 충격을 받았다.
하긴, 그러고 보면 ‘이래서 명품이구나’ 생각하며 읽었던 [최고의 명품, 최고의 디자이너](각 브랜드의 역사와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고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아서 100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회사가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주로 담겨있다.)에 나온 브랜드 중 절반 이상이 이태리 명품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장인정신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럽고 세련되고 멋진 브랜드들은 잔뜩 만들어 놓고 주말이 되면 (여름휴가철이 되면 아주 더 오랜 기간 동안) 해변에 빼곡히 앉아서는 한가로움을 즐기는 이 매력적인 모순덩어리들!
숙소 직원에게 추천받은 피렌체 중앙시장(Il Mercato Centrale Firenze)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우리나라 재래시장이 대표 먹거리를 내세우며 새단장을 하듯 이곳의 시장도 새단장을 막 마쳤다고 했다. 2층에 있는 식당가는 다양한 종류의 먹거리를 원하는 대로 골라서 주문하고 같이 앉아서 먹을 수 있는 푸드코트 같은 형태였다. 하나하나 주문을 하고 음식이 나오면 받아와야 하고 음료까지 기다려서 사야 하는 점이 불편하긴 했지만 싱싱한 해산물을 직접 보고 고르면 바로 그릴에서 구워주거나 쪄주었고, 피자도 주문하면 화덕에 넣어 구워 주는 모습에 식욕이 잔뜩 올랐다.
재래시장을 구경하면 사서 먹어보고 싶은 신선한 해산물과 야채들이 가득한데 요리할 주방이 없어서 바라만 보고 돌아서야 했다. 피렌체 중앙시장은 그런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장소였다. 얼음 위에 쌓여있는 새우를 고르면 그릴에서 금방 구워주었고 조개를 고르면 그릇에 담아 올리브유를 듬뿍 뿌려 쪄주었다.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아직 봉골레 스파게티를 먹지 못해서 이대로 이탈리아를 떠날 순 없다며 안타까워했는데 접시 한 가득 싱싱한 바지락 찜이라니! 짭짤한 조갯살과 우러나온 육수를 떠먹으며 시원한 이탈리아 맥주를 한입 가득 삼키자니 더 떠나기가 싫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