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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 Oct 19. 2019

와이너리에서 내가 꿈꾸던 바로 그것

바르지노(Bargino)

     포도밭을 거닐며 와인을 마시거나 소풍 나온 기분으로 포도밭 옆에서 간단한 식사를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레스토랑에 앉아서 포도밭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있다니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 배경의 영화에서 무심한 듯 하지만 사실은 엄청 예쁜 천을 깔고 앉아 치즈와 빵을 곁들여 와인을 여유롭게 마시는 장면이 꾀나 부러웠던 것이 분명하다.) 영화 속 장면을 기대하며 와이너리 투어도 몇 번 해보았지만 익어가는 와인향이 가득 한 오크통 창고와 기계화된 병 매입 시설을 보여주고 간단한 시음으로 끝나는 코스는 내 기대와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정작 포도는커녕 포도나무도 보지 못하고 전원풍경을 기대하며 갔다가 공장 투어를 하고 나온 셈이었다.  


     속는 셈 치고 와이너리 투어도 하고 싶었지만 시간을 맞추기는 빠듯할 것 같았고 예약을 안 하고 갔다가 레스토랑이 만석이어서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는 일이 생길까 불안해서 한국에서부터 메일로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피렌체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안티노리 와이너리(Antinori nel Chianti Classico)는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와이너리를 빼고는 이태리 와인을 말하기 어렵다 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입구에서 알려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셔틀버스를 타고 와이너리 지하에 내렸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나선 계단이 인상적이다. 어질어질 계단을 돌아올라 로비에 도착했다. 곳곳에 있는 VCR에서 이 와이너리를 건설할 당시의 영상을 계속해서 보여주는데 와인 숙성실 건축 장면과 건물 2,3층에 포도를 재배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공사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이어서 편안한 소파에 앉아 느긋이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된다. 건물 전체가 채광을 잘 이용해서 녹슨 듯한 색상의 철제 구조물이 차가워 보이거나 고루해 보이지 않고 세련되게 느껴진다.

안티노리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와인들이 셀러에 전시되어 있고 한국보다는 당연히 훨씬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아직 캐리어에 와인 싣기를 주저하는 나는 열심히 시음하고 가는 것을 택한다. 와인의 종류와 빈티지에 따라 한 잔 테이스팅 하는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한 잔이라면 평소에 병으로 먹어보지 못한 고가의 와인은 뭐가 다른지 어디 한번 경험해보자 싶어 호기롭게 15유로의 와인을 시켰다. 와인 글라스를 기계 밑에 놓고 버튼을 누르면 일정량의 와인이 나온다. 내가 1잔이라고 생각하는 기준에서 1/3 정도의 양이다. 기계가 주는 양이니 ‘어허, 이건 너무 심하잖소’ 라거나 ‘그러지 말고 2잔 같은 1잔! 뭐 그런 느낌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더 줍시다’ 같은 말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쳇!)


    한 병의 현지 가격과 한국의 예상 판매가를 생각해보니 앞으로는 다시 맛볼 일 없을 것 같은 고가의 와인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가볍게 흔들어 색을 본다. 향을 맡는다. 한 모금을 머금고 혀가 충분히 맛을 느끼도록 집중한다. (난 도저히 숨을 들이마시며 호루라기를 부는 것 같은 테이스팅 기법은 못하겠다.) 향긋하고 바디감이 있지만 탄닌(tannin)이 적당해 떫지 않고 목 넘김이 부드럽다. 상큼한 과일향은 충분하고 그렇다고 너무 시지도 않고 적당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이 정도가 내가 가진 지식을 총동원한 최선의 평가이다. 아주 좋았다는 뜻이다. 평소에 와인 매장에 가서 적절한 와인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서 원하는 바를 말할 때 자주 얘기하는 항목들이 모두 충족되는 향과 맛이었다. (반복 학습이 안되어서 쉽게 사라질 테지만) 좋은 향, 훌륭한 맛이 어떤 것인지 학습하고 기억해두려고 노력해본다.

    옆에서는 독일에서 온 커플이 테스팅이 가능한 모든 와인을 주문해 시음하고 노트에 꼼꼼히 기록한다. 담당자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다시 노트에 적기를 반복한다. 와인글라스가 가득히 싸여있고 중간중간 물로 입을 헹군다. 전문가적인 면모를 풍기며 좋은 기회를 맞아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문득 많은 일들이 취미로 즐길 때 더 즐거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면 분명 취미로 즐길 때와는 다른 부담감이 생기고 순수한 즐거움은 상대적으로 조금 퇴색되어 버리기 마련이다. 직업적 진지함으로 학구열을 불태우는 독일인을 바라보며 나는 내 와인을 순수한 즐거움으로 즐긴다. 더 큰 즐거움을 위해 맛있는 음식과 와인의 완벽한 마리아주(marriage)를 기대하며 위층의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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