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담 Jul 04. 2021

에필로그: 설거지는 테트리스다.

장보기와 설거지까지 끝내야 아침밥 준비 게임의 진엔딩을 볼 수 있다.

결혼생활 7년차다. 그간 마누라를 유심히 관찰한 결과 집안일 중 그녀가 좋아하는 일과 싫어하는 일을 찾아냈다. 좋아하는 일은 화장실 청소와 분리수거다. 하고 나면 속이 시원해진다고 한다. 싫어하는 일은 요리와 빨래다. 이유는 자기도 모르지만 어쨌든 하고 나면 자꾸 심기가 불편해진다. 그러고보니 빨래는 싫은 이유가 있다. 그냥 건조기에서 꺼내 쓰면 될 걸 왜 굳이 빨래를 '개어서' 서랍에 차곡차곡 넣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나.


다행히 빨래는 원래부터 내가 자주 해왔다. 지난해부터는 요리에도 조금씩 재미를 붙여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집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는 관계니 천생연분이라 할만하다.


#육아와 설거지 중 하나는 택해야 한다. 스마트폰을 봐서는 안된다.


그녀가 아주 싫어하지는 않지만 딱히 좋아하지도 않는 일이 설거지다. 원래 설거지는 요리를 하지 않은 사람이 하는게 국룰(암묵적 규칙)이지만 꼭 지켜야 하는 건 아니다. 요리도 하고 설거지까지 하면 모두가 행복한데 굳이 국룰을 따져가며 설거지를 피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설거지를 하면 자연스레 그 시간동안 식탁정리나 육아노동을 회피할 가능성이 높아지니 꼭 손해라고 볼 수는 없다. 국룰에 따라 설거지를 맡겨놓고는 식탁정리나 아이 양치도 안시킨채 스마트폰만 보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 입장 바꿔 내가 설거지 중인데 마누라가 식탁도 안치우고 드러누워서 폰만 보고 있으면 어떤 기분일지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수세미질은 크고 평평한 접시부터, 헹굼은 역순


실리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설거지는 마음 먹기에 따라 나름 재미있는 게임이 된다. 요리가 전략게임이라면 설거지는 테트리스 같은 아케이드 게임이다. 설거지 게임의 포인트는, 크고 평평한 그릇을 먼저 수세미로 닦아 쌓는 것이다. 바닥이 평평한 큰 접시부터 시작해 바닥이 둥근 큰 그릇, 이후 작은 그릇과 수저순으로 닦아 차곡차곡 한쪽에 쌓아 둔다. 이렇게 해야 테트리스처럼 차곡차곡 쌓인다. 그 다음 헹굼은 역순이다. 조립은 분해의 역순인 것과 비슷하다. 수저, 작은 그릇, 큰 그릇, 접시순으로 헹구며 식기건조대에 차곡차곡 쌓는다. 물론 냄비는 맨 마지막에 쌓아야 한다. 공간이 부족하면 싱크대에 대충 올려 건조시켜도 무방하다. 


또다른 설거지 게임의 공략 포인트는, 기름기가 묻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 처리하는 것이다. 과일, 채소만 담았던 그릇이나 밥솥, 밥그릇은 세제를 묻힐 필요가 없다. 그냥 그물수세미를 이용해 물로 닦아만 내면 시간도 단축되고 기름기에 오염 되지도 않아 오히려 깨끗하다. 기름이라도 식물성 기름이 조금만 묻은 정도면 그냥 그물수세미로 물로만 씻어도 깨끗해진다. 참고로 레벨 1~3까지 쓴 아침밥은 거의 대부분 세제가 필요없는 설거짓거리만 나온다. 시간을 절반만 써도 설거지 게임 클리어가 가능하다는 의미다.


#설거지는 오롯이 혼자서 완성시키는 레고 게임이다.


많은 설거짓거리가 일목요연하게 처리되어 빈틈없이 쌓여 있는 걸 보면, 마치 테트리에스에서 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나타난 작대기를 끼워 넣어 서너 줄을 없애버리는 듯한 쾌감이 있다. 일곱가지 모양 밖에 없는 테트리스에 비해 설거짓거리는 훨씬 다양한 크기와 모양이지만, 원할 때 원하는 모양을 선택할 수 있어 테트리스처럼 작대기가 나오지 않아 속 터질 일이 없다. 시간도 10여분이면 충분하니 정말로 식사 후 가벼운 핸드폰 게임 한 판을 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물론 허리는 좀 아프지만 어차피 핸드폰게임도 하고 나면 손목, 손가락이 아프다. 무엇보다 핸드폰 게임은 가정의 불화를 가져오지만 설거지 게임은 가정의 평화를 가져 온다.


그릇까지 구분해 최적의 설거지를 해내다 보면 설거지조차 전략적으로 해결하는 나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한껏 높아진다. 내 마음대로 안되는 회사일과 달리 설거지는 언제나 내 마음대로 완벽하게 해결된다. 지긋지긋한 협업도 필요 없고, 오롯이 홀로 해내면 그만인 레고 게임이다.


무엇보다 설거지는 장보기와 함께 요리를 완성시키는 행위다. 산업사회 이후 나타난 분업이 소외된 노동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듯, 설거지와 장보기를 분리시키면 요리의 참맛을 느낄 수 없다. 좋은 요리의 시작은 좋은 재료의 선별에 있고, 완벽한 요리의 마무리는 지저분한 식기와 싱크대의 처리에 있다. 좋은 요리는 먹기 전에도 보기 좋아야 하지만 먹고 난 후에도 보기 좋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고 난 식기를 즉시 깨끗이 치워버리는 이유와 같다.


이제, 완벽한 설거지 게임으로 아침밥 준비 게임의 진엔딩을 볼 시간이다.



<설거지 게임 공략 매뉴얼>

1) 기름이 많이 묻은 식기와 그렇지 않은 식기를 미리 분리해둔다.

2) 기름 묻은 식기를 평평하고 큰 접시, 작은 접시, 큰 그릇, 작은 그릇, 수저의 순으로 세제칠을 한 뒤 차곡차곡 쌓는다.

3) 그물수세미를 이용해 기름이 묻지 않은 식기와 함께 헹구듯 씻는다. 순서는 역순이다. 작은 그릇, 큰 그릇, 작은 접시, 큰 접시 순으로 건조대에 차곡차곡 쌓는다.

4) 헹주로 싱크대의 물기를 제거하고 식탁을 닦은 뒤 가볍게 씻어 말린다.

5) 고무장갑을 기술적으로 벗는다.




이전 07화 레벨 3: 그릇이 예뻐야 요리가 완성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