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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담 Jul 03. 2021

레벨 3: 그릇이 예뻐야 요리가 완성된다.

몸에 맞는 옷을 입듯, 음식도 맞는 그릇이 있다.

부끄럽지만 어릴 때 플라토닉 러브를 꿈꾸어 본 적이 있다. 세이클럽 같은 채팅 사이트가 이 위대한 정신적 사랑의 간접 체험 장소였다. 그러나 어린 청춘들의 실험은 궁금증을 이길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 만남을 갖게 됐고, 관계는 급변했다. 넷플릭스 리얼리티쇼 <블라인드 러브>가 화제가 된 걸 보면 21세기에도 여전히 육체를 떠난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자리잡고 있는 듯 하다.


공상과학 만화에는 그런 장면이 있다. 밥 대신 알약으로 끼니를 떼우는 세상. 싸고, 간편하고, 필요한 모든 영양소를 충족시켜주는 꿈의 식사. 만화 드래곤볼의 선두콩처럼 한 알만먹어도 며칠은 배가 부를 수 있다면 하루 세 끼 밥을 짓고 먹는데 쓰는 몇 시간을 아낄 수있다. 10년이면 1만 시간이다. 그 시간에 다른 무언가를 한다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도 있는 시간이다. 목적성이 분명한 삶에서는 이보다 좋은 발명품이 없을 것이다. 그럼 선두콩이 세상에 나타난다면 모두가 그걸 먹게 될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밥먹을 시간도 없는 환경의 노동자나 교정시설 수감자처럼 식사조차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만의 식사로 전락하지 않을까. 밥은 열량을 만들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그 자체로 행복을 낳는 삶의 목적 중 하나니까.


#원효대사도 컵에 담긴 물을 선호할 것이다.


밥은 배만 불러서는 안되고 당연히 맛도 있어야 한다. 세상 어느 취미보다 즐거운 밥먹는 행복을 삶에서 배제한다는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그럼 배부르고 맛있기만 하면 되는걸까. 그것도 아니다. 배도 부르고 맛도 있고 분위기도 좋고 보기도 좋아야 한다. 언택트가 아닌 콘택트를 전제로 한 사랑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보지 말라는 건 말이 안된다. 사랑에서 육체보다 정신이 좀 더 중요할 수는 있어도 육체를 아예 고려대상에서 배제할 수는 없다. 그건 마치 밥은 배만 부르면 된다는 것과 같다. 원효대사의 해골물은 동굴 속에서나 마실 일이다. 평소에도 해골에 물을 따라 마시라는 게 원효대사의 가르침은 결코 아닐 것이다.


긴 이야기를 돌았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요컨대 밥은 보기에도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요리 초보 주제에 유명 쉐프처럼 예술적인 플레이팅을 따라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굳이 못생기게 담아낼 필요도 없다. 그냥 슬라이스로 썰어도 되는 사과를 굳이 크기마저 들쭉날쭉한 괴상한 깍둑썰기로 내놓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라면은 냄비째 먹어야 제 맛이라지만 복고 감성을 자극하는 양은냄비가 아니라면 그냥 적당한 대접에 담아 내는게 상식적이다.


#사과 반 개도 껍질째 슬라이스로 썰고, 작은 접시에 꽉 차게 담아내야 한다.


그렇다고 바쁜 아침상에 예술을 차리는 건 무리다. 그래서 추천하고 싶은 방법은, 음식에 맞는 예쁘고 무난한 그릇을 사두라는 것이다. 그릇만 바뀌어도 아침상은 떼우는 것이 아닌 즐기는 것으로 바뀐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다. 씨리얼을 자주 먹는다면 국그릇정도 크기의 예쁜 씨리얼 볼을 준비한다. 국그릇보다는 훨씬 감성이 충만해 질 것이다. 사과 반 개를 준비했다면 접시도 사과 반 개로 꽉 찰 정도의 작은 접시에 내놓으면 좋다. 지름 30센치의 광활한 접시나 심지어 국그릇에 담아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하게 된다. 담겨 있는 접시만 바뀌어도 사과 슬라이스는 완전히 다른 음식으로 재창조된다.


플레이팅의 기본은 남지도 넘치지도 않는 그릇에 담는 것이다. 방울토마토 몇 개를 담는다면 작은 접시(오른쪽)에 담아야 한다.


한국인의 필수 식단인 라면을 위해서도 예쁜 라면그릇 두 개쯤은 반드시 준비해두자. 그것이 라면도 요리로 승화시키는 작업의 시작이다. 라면그릇은 떡국이나 각종 국물요리에 두루 사용 가능하니 일석이조다. 파스타는 한국 태생이 아니니 젓가락이 아닌 예쁜 포크를 준비해주자. 토스트에 바를 크림치즈도 숟가락 말고 잼 바르는 작은 버터나이프를 이용하자. 다이소에 가면 천원에 판다.


코로나 이후 늘어난 배달음식으로 생겨난 '배민맛'이라는 신조어도 그릇 탓에 생겨난 측면이 있다. '배민맛'의 뜻은 배달음식들은 군대 밥처럼 묘하게 비슷비슷하면서 저렴한 맛이 난다는 것인데, 그 원인의 8할은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에 있다고 본다. 유명 맛집의 음식인데도 일회용에 포장해오면 놀랍게도 배민맛이 난다. 그러니 설거지거리가 생기더라도 적당한 그릇에 옮겨 담아내기만 해도 '배민맛'이 꽤 줄어드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따뜻하게 먹는 음식은 한 번 데우기만 해도 완전히 맛이 달라진다. 배달원조 중국집들이 한결같이 '신속배달'을 강조하고 일회용 그릇이 아닌 식당에서 쓰는 그릇에 담아준 이유가 있다. 따뜻할 때 불기 전에 먹어야 맛있고, 싸구려 일회용 용기보다 식당용 그릇에 담겨 있어야 먹음직스럽기 때문이다.


#식기를 살 땐 반드시 마누라와 상의하자.


다만 예쁜 그릇은 생각보다 비싸고, 취향을 타는데다, 디자인이 다른 식기들이 섞이면 난잡해질 수 있다. 그러니 반드시 마누라와 상의하자. 기존에 마누라가 사 둔 식기세트가 있다면 같은 브랜드로 맞추는게 좋다. 서로 의견이 다르다면 마누라 의견을 따르자. 자신감을 가져서는 안된다. 고작 이 글을 읽고 아침밥 준비를 시작하는 정도의 레벨이라면 그릇을 보는 눈도 없을 확률이 높으니까.


몸에 맞는 옷을 입고, 피부톤을 고려하고, 상의와 하의와 신발의 조화를 고려하듯, 음식도 각자에게 맞는 식기에 담아주자. 이왕이면 깔맞춤도 해주고, 신발을 맞추듯 수저와 포크도 어울리게 맞춰주자. 밥짓기 레벨이 오를 것이다. 한 번에 사지 말고 예산에 맞춰 여러달에 걸쳐 나누어 사는 것을 추천한다. 다음달에 또 살 것이 있어야 오늘의 밥벌이도 즐거울 것 아닌가.



<아침밥을 위한 그릇 맞추기 공략 매뉴얼>

1) 집에 있는 식기가 무엇이 있는지 살펴본다. 특히 브랜드를 확인한다.

2) 만들 줄 아는 아침밥에 필요하지만 현재 집에는 없는 그릇, 식기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대충 목록을 만든다.

3) 마누라와 상의한다.

4) 가급적이면 마누라와 함께 식기를 사러 간다.

5) 딱 맞는 그릇과 식기에 아침밥을 준비한다. 아침밥 준비 레벨이 오른다.


참고로 덴비 광고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마누라가 좋아하는 브랜드라 덴비로 맞추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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