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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담 Jul 19. 2021

번외편: 음식쓰레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꾸준한 실패는 훌륭한 꼰대 백신이다.

벌써 10년 전이다. 라면 밖에 끓일줄 모르는 주제에 토마토 파스타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인터넷에서 뒤적거려보니 굉장히 쉬워 보였다. 그래서 시판 소스를 쓴다는 생각도 못하고 그저 시키는대로 진짜 리얼 토마토를 샀다. 펜션 주방에서 주섬주섬 토마토를 꺼낼 때 마누라의 불안한 눈빛을 읽었다. 그렇다. 그 때 그만두었어야 했다.


#원래 쪼렙들이 자신감은 넘친다. 똥과 된장을 구분 못하니까.


칼질도 제대로 해 본 적 없으면서 토마토를 으깨듯 잘랐다. 칼을 앞이나 뒤로 밀면서 잘라야 하는데 그냥 힘으로 작두마냥 눌러버린 결과였다. 면도 어찌어찌 소금까지 넣어 삶기는 했는데 그렇게 금방 거품이 나면서 넘칠 줄은 몰랐다. 어찌어찌 완성은 했지만 볼품이 없었다. 당연히 맛도 없다. 제멋대로인 싱크대와 면수가 넘쳐흐른 가스레인지 주변은 더 가관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마누라가 화내지 않고 조금은 먹어주었다는 사실이다. 연애 1년차였던 덕이다. 지금이라면 1년치 놀림감에다 곧바로 롤팩에 담겨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직행했을 것이다.


토마토 파스타 트라우마로 한동안 요리를 하지 않다가 결혼 후 다시 도전이 시작됐다. 이번엔 스테이크다. 야심차게 와인까지 준비했다. 후라이팬에 센 불을 켜고 마트에서 산 고기 두 덩이를 얹었다. 설마 소고기를 굽기만 하는 건데 맛이 없기야 하겠나 생각했지만, 소고기로도 얼마든지 음식쓰레기를 만들 수 있었다. 미디움으로 하려 했건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겉만 까맣게 탔다. 처음부터 태우진 않았는데 속이 너무 안익었길래 더 익히다보니 그리 되었다. 약불, 중불을 쓸 줄 모를 때였다. 까짓거 레어로 먹을 수도 있지 않나 싶겠지만 너무 질겼다. 마리네이드도 없이 대충 구워도 부드럽고 맛있으려면 비싼 1++를 샀어야 했지만 본능적으로 가성비를 따지며 샀더니 결국 사단이 났다. 당연히 그대로 롤팩으로 직행했다. 소고기 쓰레기가 담긴 롤팩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 없었다. 기분은 나쁘지만 화를 낼데도 없고, 눈물이 핑 돌지만 쪽팔려서 울 수도 없다.


#마트에 파는 야채는 대부분 씻어야 한다. 뽀득뽀득.


이후에도 자잘한 도전과 실패는 계속됐다. 마누라 생일이라고 미역국을 끓이다 가스레인지에 넘쳤고, 국간장이 아닌 진간장을 넣어 새로운 맛을 경험시켰다. 하다못해 냉동만두조차 센 불에 굽다 겉은 타고 속은 차가운 겉바속냉의 신세계를 경험했다. 이후 중불의 세계에 눈 뜬 뒤 만든 프렌치토스트는 태우진 않았지만 설탕과 소금을 구분못해 소금을 뿌려 내놓았다. 눈으로 구분이 어려워 맛도 조금 봤지만 구분해내지 못했다. 과감히 팍 찍어 먹어보지 않으면 의외로 헷갈린다. 소포장 샐러드를 판다는 걸 알고는 발사믹 드레싱과 함께 야심차게 샐러드를 준비했으나 중간중간 거뭇거뭇한 것이 보였다. 샐러드 야채를 물에 씻어서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상추나 야채를 한 장씩 씻어야 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게 썰려 있는 소포장 양상치는 당연히 씻어서 나온 건줄 알았다. 그 덕에 본의아니게 자연인을 경험했다.


근래에도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커뮤니티에서 유행한 오븐야채구이를 만들었더니 핵심인 가지가 흐물거렸다. 가지는 좀 두껍게 썰어야 하는데 식재료의 특성을 몰라 똑같이 얇게 썬 결과다. 엊그제도 감자수제비를 만들었는데 도무지 감자가 보이지 않았다. 역시 두툼하게 썰지 않고 감자볶음처럼 얇게 썰어 넣었더니 수제비가 다 익기도 전에 완전히 퍼져버렸던 것이다. 


#꾸준히 실패하지 않으면 꼰대가 될 수 있다.


그래도 이제는 음식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일은 거의 없다. 적어도 튜토리얼(게임 입문자 교육) 단계는 지난 덕이다. 더구나 일정한 실패는 레벨업을 위한 필수 과정 아닌가. 하던 방식이 익숙해 새로운 길을 찾지 않을 때 사람은 늙어가고, 남들의 새로운 방식을 배척하면 꼰대가 된다. 그러니, 실패는 꾸준히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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