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IR-2.9] 기업혁신과 융합-9
‘제2의 물결(즉, 산업혁명)’이 정점을 지나고 있을 때 많은 학자/전문가들은 새로이 등장하게 될 세상을 후기(또는 탈)산업사회(다니엘 벨, 1973), 후기자본주의, 지식사회(피터 드러커, 1969) 등으로 불렀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제3의 물결(즉, 정보혁명)’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제4의 물결(메이나드 & 메르텐스, 1993), 개념시대(다니엘 핑크, 2005), GNR 혁명(레이 커즈와일, 2005), 후기정보사회(이어령, 2006), 제3차 산업혁명(제러미 리프킨, 2011), 제2의 기계시대(에릭 브린욜프슨 & 앤드루 맥아피, 2014), 제4차 산업혁명(클라우스 슈밥, 2016) 같은 이론/가설이 제기되었다(참조: https://brunch.co.kr/@duk-hyun/5). 이들은 공통적으로 정보혁명 이후의 대변혁은 신기술의 급속한 발전에서 비롯되어 경제, 사회, 문화, 나아가 인간 정체성(identity)에 대한 재정립도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혁명의 단계를 나누는 기준이나 도래 시기, 지속 기간, 혁명 이후 세상에 대한 (낙관적 또는 비관적) 전망 등에 대해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리프킨은 의사소통 기술과 에너지원을 기준으로 혁명의 단계를 구분했기에 현재 인터넷과 재생에너지가 일으킨 3차 산업혁명이 진행 중이라고 했다. 반면, 슈밥은 디지털 혁명(3차 산업혁명)의 기반 위에서 여러 가지 자연과학/공학 분야 기술융합이 확산됨에 따라 이미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위의 여러 이론들 중에서 GNR 혁명, 제2의 기계시대, 제4차 산업혁명 등은 대변혁의 동력으로 기술융합을 꼽고 있다. 즉, GNR 혁명은 인간 유전자 정보를 세세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유전학(Genetics), 자기복제가 가능한 물질을 분자 단위에서 조립할 수 있게 하는 나노공학(NT), 그리고 초지능을 가진 로봇(Robot) 등 기술융합이 만들어 낼 대변혁을 의미한다. 제2의 기계시대는 로봇(HW)과 AI(SW)의 융합에 따른 인간 정체성의 위협을, 제4차 산업혁명은 디지털기술, 생명계기술, 물질계기술 등의 융합 결과 등장하게 될 미래사회를 각각 언급한 것이다. 한편, 융합(convergence)은 2000년대에 들어서서 미국, EU, 우리나라 등을 포함한 전 세계 주요 국가들이 추진해 온 R&D 및 혁신(innovation) 전략으로 이미 여러 가지 성과를 이룩하였다. 예를 들면, 스마트폰은 IT에 BT(예: 바이오 인식, 건강상태 모니터링), NT(예: 반도체, 배터리, 신소재) 등이 결합된 융합제품으로 불과 10년 사이에 개인생활과 경제활동에 큰 변혁을 일으켰다. 인간의 질병 예방과 수명 연장을 가능하게 할 유전자 분석/가공/편집 기술은 NT, BT, IT 등의 융합 결과이다. 그 외에도 자연과학/공학, 사회과학, 인문학, 문화/예술 등 광범위한 영역의 지식/기술이 융합된 여러 가지 제품/서비스(예: 인공장기, 맞춤진료, 자율주행자동차, 스마트로봇, 바이오 컴퓨팅, 신/재생에너지 등)들이 머지않아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 줄 것으로 예상된다. 이처럼 자연발생적 또는 의도적 기술융합에서 비롯된 대변혁은 적어도 20년 전쯤 전에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고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를 미국 과학계에서는 융합혁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미국은 2002년, 미래사회 대응을 위해 국가차원에서 NBIC(즉, 나노-바이오-정보기술과 인지과학) 융합기술 개발에 집중 투자하기 시작하였다. 10년이 지난 2013년 7월, 과학재단(NSF)은 WTEC(World Technology Evaluation Center)와 함께 CKTS(또는 NBIC2)라는 새로운 융합전략을 발표하였다. CKTS는 Convergence of Knowledge, Technology, and Society 즉, (인류 차원의)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지식과 기술의 융합을 의미한다. 이 전략은 NBIC 융합기술 R&D에 대한 그간의 성과 및 세계 주요 국가의 융합 추진 동향에 대한 조사분석 결과와 미국은 물론 EU, 중국, 한국, 일본 등 전문가들의 의견이 종합, 반영된 것이다. NBIC 전략이 인간의 능력(예: 개인의 지적/육체적 능력, 집단의 성과, 과학과 교육) 향상을 위한 R&D 중심-즉, technology push 방식-이었음에 반해 CKTS 전략은 인류가 당면하고 있고 당면하게 될 경제/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혁신 중심- 즉, market/society pull 방식-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CKTS 전략은 한편에서는 10여 년간의 투자를 통해 NBIC 기술융합 성과가 축적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인류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예: 물/에너지/식량 부족, 질병, 환경오염,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의 심각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음을 감안한 것이다.
CKTS 전략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목표/비전을 설정하고 있다.
▪ 웰니스와 인간 개발의 개선 (예) 바이오 마커와 빅데이터를 이용한 질병의 모니터링, 예측/치료/예방, 면역체계 개선; 인공장기/보조기구 개발; 전염병 조기 발견-대응
▪ 생산성과 경제 개발 증진 (예) 분산/초연결 제조, DNA처럼 조립/재구성 가능한 공정(‘Manufacturing Process DNA’), 설계-제조 최적화를 위한 물질과학-사회과학 통합
▪ 사회의 지속가능성 달성 (예) 공기/물의 오염 상태, 주요 생물의 건강상태와 이동 등에 대한 글로벌 모니터링-대응; 메가시티의 수송, 에너지 생산/소비, 제조 관련 효율 향상
▪ 개인과 커뮤니티의 권한 증대 (예) 정보자원, SW, 제품/서비스 등을 전 세계가 공동 생산할 수 있는 통합된 인지사회(Cognitive Society) 건설; 이를 위한 문화과학(Cultural Science), 시민 참여를 위한 시민과학/공학(Citizen Science/Engineering) 육성
▪ 인간의 지식 및 교육 확장 (예) 인문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등의 초학제적 접근; 지식/학문간 소통 설계를 위한 HW/SW/인지/문화 플랫폼 구축; MOOC 같은 새로운 교육방식 개발; 각종 출판물/데이터를 공유하기 위한 글로벌 데이터베이스 구축
▪ 혁신적이고 공평한 사회 구현 (예) 신기술 제공 기회의 공평 분배, 혁신적 제품/서비스 개발-활용 과정에 대한 합리적 거버넌스 구축, 순수연구와 융합연구의 균형 유지
NSF/WTEC는 CKTS 전략을 실현하기 위해 4 계층의 기술 플랫폼 즉, 맨 아래 NBIC 융합기술 위에 다음과 같은 3개 플랫폼을 얹은 지원 시스템의 구축을 제안하였다.
▪ 인간활동(human-scale) 지원 플랫폼: 개인 간, 인간-기계간, 인간-환경 간의 원활한 상호작용을 지원하는 기능(예: 제조 현장을 위한 인간과 센서, 로봇의 통합)
▪ 지구/환경(Earth-scale) 지원 플랫폼: 지구-기술 통합 서비스(예: 천문/우주 탐사, 해양, 인프라, 기후)나 글로벌 서비스(예: 의사소통, 상호작용, 경제, 모니터링)
▪ 공동체(societal-scale) 지원 플랫폼: 개인과 공동체(예: 국가, 세계)의 연결을 지원하는 서비스(예: 인간-기술의 공진화, 조직과 절차- 즉, 거버넌스, 투자정책, 규제)
4차 산업혁명론(‘4IR’)과 CKTS를 비교해 보면, 4IR은 공급자 관점, 기술융합 중심, 지역/국가의 당면 문제 중심임에 반해 CKTS는 수요자 관점, 기술-산업-사회융합 포괄, 인간과 지구의 미래문제도 고려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4IR이 공급자 관점이라 한 것은 아직까지는 디지털 기술, 물질계 기술, 생명계 기술의 융합 결과로 나타날 기회와 위협에 주목하고 있고 기술융합과 병행되거나 선결되어야 할 사회문제에 대한 논의는 미흡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CKTS가 수요자 관점이라 한 것은 특정 기업/산업이나 국가 차원을 넘어 전 세계가 함께 추진해야 할 어젠다(예: 글로벌 지식공유와 인지사회 건설, 질병이나 재해에 대한 글로벌 모니터링-통제 시스템 구축)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배경에서 CKTS는 4IR이 주목하고 있는 자연과학/공학 분야의 신기술 외에 사회과학, 인문학, 문화예술 등 넓은 의미의 기술융합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슈밥은 4IR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방안으로 기술융합 외에 이해관계자의 참여와 협력적 & 수평적 거버넌스 구축을 제안했지만, CKTS는 더 적극적으로 시민과학/공학, 문화과학 등의 개발을 통한 새로운 조직 구조와 운영개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 마디로, CKTS는 기술융합과 제품/서비스 융합, 산업융합 등 경제 혁신을 넘어 전 세계 사회/문화 발전과 인류 공영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래 그림은 CKTS와 4IR 논의의 현 수준(2017년 기준)을 필자가 주관적으로 비교해 본 것이다.
이상, 디지털 혁명 이후 세상에 대한 여러 이론/가설과 2000년대 이후 여러 국가와 선도기업이 추진해 온 융합 전략과 실제 사례를 종합해 보면, 우리가 ‘4차 산업혁명’(4IR)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준비/대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몇 가지 방향을 찾을 수 있다.
첫째, 4IR은 기술융합에서 비롯되어 경제체제 전반의 변혁으로 진전되고 있지만, 사회융합(또는 사회혁신)이 전제(또는 병행)되어야 한다. 사회융합은 지역/국가를 넘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이해관계자의 이해/공감, 참여/협업 등을 실현하는 것으로 수평적, 협력적 거버넌스(즉, 조직, 리더십, 제도)를 통해 추진되어야 한다.
둘째, 4IR에 대응하기 위한 R&D는 순수연구와 융합연구로 구분하고 양자 균형이 유지되어야 한다. 순수연구는 전통적 학문/지식 영역별 연구를 가리키며, 융합연구는 학제간-다학제-초학제(MIT: Inter-, Multi-, Trans-disciplinary) 연구를 가리킨다. 융합연구에는 특히, 사회과학, 인문학, 문화예술 등의 이론과 접근방법이 적극 도입, 적용되어야 한다.
셋째, 4IR에 대응하기 위한 기업혁신은 초연결-초지능을 지원하는 플랫폼 구축(: 수단)을 통해 기업생태계에 참여하는 모든 이해관계자의 가치 향상(: 목표)을 지향해야 한다.
넷째, 4IR은 궁극적으로 인간 중심 & 인류 번영이라는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 즉, 모든 기술과 제품/서비스는 인간과 자연이 지속 가능하도록 설계, 구현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