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기업도 신입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거래를 할 때는 믿을만한 상대방이랑 거래를 하고 싶다. 그리고 믿을만한 상대방이라는 정보는 상대방의 네임 벨류, 과거 경력이 아닐까 싶다. 역으로 말하면 네임 벨류가 없고 경험이 없는 신생업체는 쉽게 거래처를 확보할 수 없다. 상대방도 큰 장점이 없다면 굳이 신생업체와 거래할 이유가 없다.
이런 냉정한 현실로 신생업체가 살아남기 쉽지 않다. 힘들다. 상대방에게 나에 대한 정보, 신뢰를 주기 위해 더 노력을 해야 한다. 내가 믿을만한 업체라는 것을 증명해 보아야 한다. 내가 믿을만한 업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회를 얻어야 하는데 기회를 얻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리고 이런 나의 간절함, 절실함, 어려움을 알고 접근하려는, 능구렁이 같은 업체들도 있었다. 능구렁이 같은 업체란, 세무분야 쪽이 아닌 일반 중소기업 업체로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준비 중인 업체였다.
지나고 보니, 이 능구렁이 업체들이 원했던 것은 무료 세무 서비스였다. 하지만 말로는 같이 성장해 나갈 세무사를 찾고 있다고, 업무 협업을 하길 원한다고 했다. 나도 같이 성장해 나가길 원했고, 당장에 이득은 볼 수 없지만 또한 금전적으로 손해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판단 하에 업무 협업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능구렁이 업체들은 뭔가 수상했다. 우선 계약서를 안 쓴다. 계약서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엄청난 미래, 젖과 꿀이 흐르는 지상낙원이 기다리고 있다며, 이런 희망찬 미래를 가져올 서비스에 적용할 세법과 세무 리스크를 알아봐 달라고 했다. 오랫동안 같이 일하고 있는 세무대리인도 있고, 난다 긴다 하는 세무법인, 회계법인과 끈끈한 인연이 있는데, 굳이 나랑 거래를 하고 싶다고 했다. 본인들이 알고 있는 세무사/회계사/세무법인/회계법인은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 새로운 분야에 도전을 안 하기 때문에, 나처럼 젊고 패기 있는 세무사와 일하길 원한다고 했다.
한 업체는 꽤 오래 협업을 해왔다. 그들이 그리는 미래는 나도 원했던 미래라서, 불리하고 찝찝한 부분이 있지만 투자라고 생각하고 협업을 3~4개월 했었다. 협업이 한창 진행되었을 때야 비로소 계약서를 쓰기 시작했다. 계약서에 따르면 내가 가져가는 수익은 극히 적었다. 불합리하다 생각해 수익 부분 조항에 대해 여러 논의를 했지만, 결국 내 뜻이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엄청난 불만이었지만, 사실 나는 자본을 한 푼도 제공하지 않기에 감수하기로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낸 놈의 목소리가 큰 건 당연한 이치니까.) 내가 가진 유일한 자산인 노동, 지식으로 상상했던 미래를 ,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이 정도 투자는 해볼 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법적 책임 부담을 내가 진다는 조항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책임 부담 조항에서 오랜 논의(라고 쓰고 다툼이라고 부른다) 끝에, 업무 협업을 종결하기로 했다.
3~4개월 동안 능구렁이 업체에 제공한 나의 세법 지식과 세무 업무 처리 노하우, 세액 계산이 녹아들어 가 있는 엑셀 파일들이 아까웠지만, 여기서 멈추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 업체를 상대하기엔 난 너무 가냘펐고 순진했다.
능구렁이 업체는 사업, 사회경력, 심지어 정치경력까지 갖춘 으른이었다. 소위 사회경력 짬이 대단한 분들이었다. 그에 비해 난 이제 막 사회에 나온 꼬꼬마였다. 그러니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거래의 기본인 계약서도 안 쓰고 업무를 시작했지. 돌이켜 생각해 보니, 수익 분배와 책임 부담과 관련된 계약서를 수정하는 과정에선 그들은 추울 정도로 냉정해지며 손해를 1도 볼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 태도 안에서, 너랑 거래하는데 왜 내가 손해를 봐? 란 의도가 있었다. 경력도 네임 벨류도, 빽도 절도 없고 이제 막 사무실을 차린 나와 거래하는 이유는 그저 가격이 싸서, 싸다 못해 저렴했기 때문이다.
나도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포장하며 협업을 진행했지만, 사실 경력한 줄이 필요했었다. 시간과 노동을 투자해 번듯한 경력을 쌓고 싶었다. 번듯한 경력을 바탕으로 다른 업무도 수임하여 일거리를 창출하고 싶었다. 많은 경력을 쌓아 신뢰가 가능한, 능력 있는 세무사로 거듭나고 싶었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세무사가 되길 꿈꿨다. 하지만 결국엔 이루지 못하고 능숙한 사회 선배들에게 이용만 당했다.
허참, 신입 기업은 어디서 경력을 쌓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