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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ukbo Jul 30. 2020

나는 바닥을 보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나는 바닥을 보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이를 스스로 의식하기 전까지 나는 사람과 대화할 때도 그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고, 아름다운 프라하의 5월 풍경 대신 흔해 빠진 돌로 만들어진 도로를 응시하며 걸었다.


학교에 목련 마당이라는 곳이 있다. 봄이 되어 꽃이 피면 사람들이 하나씩 잡은 가지를 코에 박은 듯한 자세로 사진을 찍는다. 목련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름다웠던 목련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바닥을 보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많이 봐왔던 목련은 꽃잎 단위로 살해되어 있었다. 그들의 모든 부분이 검은색으로 썩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적나라하게, 대놓고 ‘나 죽어간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생명도 없을 것이다. 나에게 목련은 바로 그것이었다. 검게 죽어가는 것.


사람들은 자신이 잡고 있던 가지에서 떨어진 목련에는 관심이 없다. 내 기억에 목련은 피어있는 시간이 짧다. 그들이 가지에서 피어있는 시간과 바닥에서 죽어가는 시간은 비슷할텐데, 사람들은 목련의 꽃잎이 떨어지는 때는 기억하지만 그 꽃잎이 완전히 소멸하는 때는 모른다.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비극을 싫어한다. 죽어가고 부정적이고 더러운 것을 싫어한다. 가지에 피어난 꽃잎과 바닥에서 죽어가는 꽃잎, 생명의 이름은 같은데도 말이다.

꽃이 핀 나무의 바닥은 외면해버리고 만다. 내가 누군가가 애써 숨기는 상처를 못 본 체했듯이 말이다.


얼마 전에 새벽 산책을 하다가 목련 마당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멀리 보이는 차의 불빛을 피하다가 바라본 곳에는 목련이 피어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목련을 보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처음으로 목련이 피어있는 풍경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


어제 우체국을 가다가 다시 목련 마당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항상 보던 익숙한 풍경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서 죽어가는 꽃잎과 텅 빈 마당. 항상 죽어가는 목련을 먼저 떠올렸었다. 하지만 목련이 아름답게 피어있을 때도, 저들이 떨어져 죽어가는 모습 때문에 슬퍼하지는 않았다.


보통의 꽃은 태양이 온기를 전해주는 남쪽을 바라보고 피어나지만, 목련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겨울 냉기의 찬바람이 불어오는 북쪽을 바라보고 피어난다고 한다. 검게 죽어가며 소멸된 꽃잎은, 해가 바뀌면 죽음과 부정과 더러움을 극복하고, 찬바람을 맞으며 다시 아름답게 가지에 피어날 것이다.

소나무는 항상 같은 모습이지만 소나무를 보러 가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이 목련을 보러 가는 이유는, 목련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바닥을 보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2020.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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