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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ukbo Aug 02. 2020

기억의 방법

냄새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제 배관 세척제를 부어놓았던 화장실에서 초등학교 때 견학으로 자주 갔던 호텔의 수영장을 떠올렸고, 잠시나마 물속의 무중력을 유영했다.


소리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무개 1이 자신에게 던진 아무런 의도가 없는 한마디에도 과거 자신을 괴롭혔던 아무개 2의 잔상이 아른거렸고, 이를 혼자 삭히며 답답해했다.


풍경으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학교를 지나가며 거위를 볼 때마다 절제와 책임이 없는 생활을 즐기던 호수의 풍경에 자신을 그려 넣었고, 불완전한 해방감을 만끽했다.


촉감으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땀에 젖은 츄리닝 바지를 세탁기에 넣으며 모두를 사랑하지 않고 모두에게 사랑받지 않던 19세로 돌아갔고, 천장의 흰 벽지를 바라보며 푸념의 독백을 하기 시작했다.


심장 박동으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럽 골목의 낯섦에 취해 걸으며 회색 가디건을 입고 있던 까만 눈동자의 그녀를 떠올렸고, 이내 얼굴의 튀어나온 모든 곳이 불그스름해졌다.


모든 것으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떤 이유인지도 모른 채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행복하기도 했고, 반대로 문득 불행하기도 했다. 가끔은 떠오르는 기억도 없이 행복하거나 불행했다. 사실 이 경우에는 십중팔구 불행했고, 불행보다는 불안이 맞는 단어였다.


모든 것으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떠오르는 기억도 없이 오늘도 잠에 들지 못하는 불행을 겪었고, 역시나 불행보다는 불안이 맞는 단어였다.


행복은 느낌보다는 경험이랬고, 나는 어려운 말은 못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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