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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ukbo Oct 16. 2021

감정 기작

이유도 모르고 우울해해서 죄송해요.  우울해하냐고 물어봤었죠.


감성적이라는 말로 포장은 그만하겠습니다. 표현은 못 하겠어요. 제가 아는 모든 단어를 쏟아부어도 표현이 되지 않습니다. 수백 일에 걸쳐 찾아도 보고, 표현하려 글도 써봤죠. 표현할 수 없어 보이는 것을 표현하기. 나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데에 시간을 허비하는가.


제가 드러내는 것이 우울은 맞습니까? 아무리 느껴봐도 감정은 구체적이지가 않아서요. 묘사라는 단어를 꺼려 합니다. 뭐랄까, 다소 높은 해상도의 단어 같아요.


국립국어원에 구체적의 반의어가 무엇인지 물어봤죠. 추상적이라고 합니다. 맞나요? 저는 어설프다에 보다 가까운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냉장고 신선칸에서 썩어가는 귤 두 개와 먼지가 쌓여가는 노트북 뒤쪽 책상을 보며 ‘아, 이 좁은 방 안에서도 나의 행동반경은 제한적이구나’라는 생각 따위를 하는 식입니다.


시원적이다에 좀 더 가깝다는 표현을 써도 될까요?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어요.


말이 길어졌는데, 어찌 되었든 이유도 모르고 우울해해서 죄송합니다. 어설픈 인간의 어설픈 감정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구체화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설프고 뭉툭하기도 해도 이토록인데, 구체적이고 날카롭다면 살갗을 뚫고 나올지도 몰라요.


그래도 결국 돌아올 겁니다. 제가 이유도 모르고 행복해질 수도 있을 줄 누가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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