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혐오와 연민의 바다
“고래 묘사들이 잔뜩 있는 챕터들이 유난히 슬펐다. 자신의 넋두리에 지친 독자들을 위한 배려인 걸 아니까. 이 책을 읽으며 내 삶을 생각하게 됐다.”
종교에 대해 잘 알지는 못 하지만 상당히 종교적이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
일단 주인공인 찰리가 극 중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인물부터가 토마스다. 그는 자신이 새생명이라는 이름의 교회 소속이라고 밝힌다 (결과적으로는 거짓말이었지만).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현재의 세상에는 종말이 오고, 선택을 받은 일부만이 구원을 받아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의 조건은 간단하다. 신을 믿는 것이다.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리즈가 말하긴 했지만, 그들은 이단에 묘사된다. 그러자 토마스를 발끈한다. 그들이 진짜로 이단이라는 확실한 증거다.
종교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나는 왜 저런 이유만으로 이단으로 불리는지 모르겠다. 종교라는 것이 원래 대충 뭐 예수 믿고 성실히 살고 하면 천국에 보내주고, 아니면 지옥에 보낸다는 거 아니었나? 그 사이의 사건이 죽음이냐 세상의 종말이냐 차인데, 어차피 내가 죽으면 현실에서의 내 세상은 자연스러운 종말을 맞이한다. 솔직히 뭐가 다른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서 영화는 구원에 대해 계속 얘기한다. 구원의 전제는 연민이다. 연민의 양분은 오만 혹은 자기 만족이다. 내가 연민의 대상보다는 낫다는 오만, 그리고 그 모습에 대한 자기만족. 영화가 솔직함을 강조하고 있으니 나도 하나 솔직하게 말해보자면, 내가 한창 주 2회씩, 그리고 해외까지 나가서 봉사를 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자기 만족이었다. 봉사를 할 때만큼은 나의 가장 선하고, 순수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모습이 보인다는 자기 만족. 그래서 연민은 쉽게 지친다고 말하는 것이다. 피자배달부 댄의 모습 그 자체다. 대부분의 사람처럼, 가슴이 아픈 것은 최초의 그 호의는 언제나 달콤하다는 것이다.
솔직함에 대한 찰리의 생각도 모순적이다. 게이임에도 결혼해서 딸까지 낳은 그가, 남자 제자와 사랑에 빠져 아내와 8살짜리 딸을 버리고 도망친 것이 유일하게 자신에게 솔직했던 순간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모두 지옥에 빠졌다. 자기 혐오의 늪. 거식증에 빠져 죽은 애인 생각에 272 kg가 된 찰리, 오빠를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평생 찰리를 간호한다는 벌을 스스로에게 준 리즈, 세상에 대한 반항과 염세주의에 빠진 아내 메리와 딸 엘리까지.
그럼에도 찰리는 솔직함을 믿는다. 엘리가 9학년 때 쓴 에세이처럼. 자신의 넋두리에 지친 독자들을 위한 배려인 걸 아니까. 찰리가 에세이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또한 증오의 대상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안식을 찾지 못하는 것을 깨달은 엘리처럼. 죽어가는 찰리가 메리와 엘리를 함께 만나는 장면이 너무 슬펐다. 몇 년 만에 찰리를 만난 메리와 엘리의 감정에는 작지만 사랑도 있었다. 분명히 있었다.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남자의 역겨운 모습을 마주한 메리, 증오하면서도 아빠의 사랑과, 아빠를 향한 사랑이 그리웠던 엘리. 스스로 걸으라고 소리치던 것도, 가짜 희망을 안겨주는 그릇을 깨버린 것도. 그녀는 그저 그녀를 위해 찰리를 원하고 있었다.
찰리는 어쩌면 구원 따위가 아닌 명분을 찾고 있었다. 자신이 죽어버려도 된다는 명분. 예를 들면 역겨움이다. 고래 묘사만 잔뜩 하면서도 자신의 넋두리를 멈출 수 없던 이유는, 멈추기 싫었기 때문이다. 진작 내 인생에 있어 줄 수 있었다는 엘리의 말에 찰리는 이렇게 답한다. 누가 나를 자기 인생에 끼워주고 싶겠어. 그는 자기혐오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더욱 모두에게 혐오 받는 존재가 되어갔다.
시궁창 속의 모두가 밤하늘의 별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또한 모두가 그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모두의 얼굴로 둘러싸인 화면 속 혼자 검은 찰리의 온라인 속 화면처럼. 그리고 토마스가 그토록 행하고 싶어 하던 구원을 오히려 받게 된 것처럼. 심연 속의 누군가를 반드시 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오만을 깨닫게 해주는 영화다. 신은 닿지도,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만 손짓하며, 간절한 누군가의 기도에 응답하는 것은 신성함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구원을 받았다. 다름 아닌 엘리에게. 엘리는 찰리의 말대로 특별한 존재다. 아빠를 증오하는 것이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엘리는 더 이상 찰리에게 사랑을 표현하지 않지만, 증오하지 않고 있었다. 찰리의 집에 유일하게 햇빛이 드는 순간이었다. 엘리의 울음 섞인 표정 뒤로 밝은 빛이 비쳐올 때 찰리는 그것을 깨달았다. 역시나 엘리는 정말 특별한 존재다. 그녀가 찰리를 구원한 것은 연민 따위가 아니었다.
추신:
1.33:1의 화면비를 선택한 이유도 비슷할 것이다. 화면에 온전히 들어오는 찰리의 거대한 몸집처럼, 손 닿지도 않는 곳에 구원 같은 것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고.
추신2:
세이디 싱크는 정말 놀라운 배우다. 기묘한 이야기에서 맥신으로 처음 봤을 때는 그저 귀여운 소녀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