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추조 Jun 07. 2018

조카의 출장

 “삼촌, 모래 아침 10시에 회의가 있어서 낼 저녁에 여수 내려가는데 6시쯤 여수공항에 내려요. 별일 없으시면 저녁이나 같이 하시죠.”

 어제 아침에 전화기를 보니 조카가 엊저녁에 보낸 카톡이 있었다. 지난달 초에 이어 두 번째 출장이었다.


 여수가 처음이었던 첫 번 출장에서는 동료들과 저녁을 같이 하고는 술에 취해 어디에 있는 호텔에서 잤는지도 모른 채 늦은 아침에 전화했었다. 제 엄마가 여수에 가면 꼭 삼촌에게 들려 식사를 대접하고 오라고 했다며 어디로 가면 되느냐고 물었다. 마침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이어서, 택시 타고 아파트로 찾아온 조카를 데리고 근처 식당에서 국밥으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기차역까지 데려다주었다.


 대구 근처의 지방에서 근무하다 지난 3월 여의도에 있는 본사로 발령을 받았던 조카는 앞으로 매달 출장을 올 것 같다고 했다. SCM(Supply Chain Management)이라는 업무의 특성상 생산현장과 조율하는 회의 참석이 필수라는 거다. 업무의 성격상 스트레스가 심할 것 같았으나, 매사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의 조카는 ‘괜찮아요, 재밌어요’를 연발했다. 지방에 있을 때는 정시에 퇴근했는데 본사에서는 그럴 수 없다며, 새벽 3시에 퇴근한 적도 있다고 했다.


 30년 전인 1988년에 본사로 처음 발령받았다. 여의도에 있는 ○○본부에서 근무하다 승진해서 발전소 건설현장으로 갔고 본사로 가기 전까지는 거의 ‘칼퇴근’이었다. 오후에는 할 일이 없어서 퇴근 때까지 서류나 뒤적이며 기다리는 시간이 지겨울 정도였다. 사택까지 출퇴근은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음주단속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이었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서울에 집을 두고 기러기 생활을 하는 부장을 모시고 동료 과장들과 술 마시러 다니는 게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


 본사는 달랐다. 그동안 천국에서 놀았다면 그곳은 지옥이었다. 9시 전에 퇴근하는 일이 드물었을 뿐 아니라 종종 밤을 새우는 일도 허다했다. 일도 많을 때는 할 수 없지만 일이 없어도 그랬다. 높은 분이 퇴근하지 않으면 부장들도 자리를 지켰고 우리에게 부장 눈치를 살피는 건 당연하고도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어쩌다 일찍 사라진 높은 분들 덕분에 일찍 퇴근하는 날은 동료들과 대폿집에서 큰소리로 떠들며 위축될 대로 위축된 기(?)를 살렸다. 누구의 입이라고 할 것 없이 ‘ㅈ같이’라거나 ‘ㅆㅍ’ 같은 욕들이 튀어나왔다.


 “삼촌, 우리는 안 그래요. 지금 시대에 누가 그렇게 지내요? 요즘은요, 할 말 다해요. 팀장이나 이사가 부당하게 처신하면 당장 고충처리위원회에 달려가죠.”

 옛 기억을 떠올리며 봄날은 다 가고 이제부터 추운 겨울일 거라는 내 말을 조카는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조카는 공항에서 택시 타고 왔고 내가 사는 근처에 호텔을 잡았다. 어차피 회사 법인카드를 사용하기 때문에 굳이 삼촌 집에 불편하게 있으며 회사 돈을 아낄 필요가 없다는 거다. 35년 전 연수생으로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우리는 일당(per diem)으로 생활비를 받았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우리는 어떻게든 아껴서 남겨가려고 궁핍하게 생활했다. 홍콩에서 온 연수생들도 있었다. 그들은 쓴 만큼 회사에서 정산해주었다. 그들은 호텔 생활을 했고 우리는 싸구려 스튜디오를 빌려 소파에서 잤다.


 34년의 차이가 있는 조카가 다니는 본사는 34년 전 내가 일했던 건물 옆이다. 그때는 그곳이 빈터였고 내가 있던 9층 건물도 강북 강변로에서 보면 그럴듯했었다. 지금은 다르다. 빈터였던 곳에 들어선 수십 층 높이의 건물은 과거의 9층 건물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30여 년 전 코흘리개로 겁먹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조카는 186센티의 건장하고 훤칠한 청년이 되어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식당을 찾아 걸어가는 동안 170센티의 나를 왜소하게 만들었다.


 닭갈비집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철판이 얹힌 원형 테이블 빈 곳에 앉았다. 고추장 양념을 버무린 야채와 닭고기들이 소리를 내며 익었다. 주변 테이블에는 젊은 남녀들뿐이었다. 조카가 아니었다면 머리가 허연 내가 그곳에 어울렸을까. 조카도 나도 프로야구 같은 팀의 팬이었다. 현충일이라 낮에 했던 경기에서 7연승을 하던 응원 팀이 무력하게 지고 말았다. 34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화제로 넉넉했다.


 “원래는 내일 오려고 했는데 비행기가 없어요. 아침에 있는 회의에 참석하려면 5시 KTX를 타야 하는데 그것보다는 여기서 자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지난달 서울에 갔을 때도 대면하지 못했던 공사다망한 젊은이와 마주 앉는 일이란 흔치 않다. 자식이 셋이나 있어도 가까이에 없으니 그림 속의 떡일 뿐이다. 프로야구뿐 아니라 정치적 견해도 일치한다. 공감대가 있는 젊은이와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


 언제였던가, 대학생이던 조카가 어학연수 겸 1년 동안 뉴질랜드로 ‘워킹홀리데이’를 갔었다. 뉴질랜드에 살았던 나는 그곳에서 만난 친구에게 도움을 주도록 부탁했던 것도 화제에 올렸다.

 “뉴질랜드 생각은 안 나니?”

 “나죠, 가끔 가고 싶기도 합니다. 특히 미세먼지가 많을 때는.”

 “아무리 공기 좋고 살기 좋으면 뭐 하니? 너 같은 젊은 사람들은 그런 곳에서 못 살아. 나도 가끔 생각나고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Permanent Returning Resident Visa’가 있어도 거기서 살라면 못 살 것 같다.”

 “하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나이가 훨씬 많아지면 모를까.”


 금방 아홉 시가 지났다. 내일 아침에 회의가 있다는 조카를 마냥 붙들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20대 조카에게는 괴로웠는지 몰라도 60대의 삼촌에게는 모처럼 즐거운 시간이었다. 삼촌과 조카 사이에 패밀리 히스토리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고, 사회 선후배로서 경험과 다름에 대한 나눔이 있었다. 워낙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내 경험이 쓸모없는 것일지라도, 인생 선배로서 꼰대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 값 대신이라도 하려면.


 “젊었을 때 네트워크를 충분히 만들어 놓아라. 나중에 큰 힘이 된다. 너무 이해타산에 얽매이지 말고 손해 보는 것을 즐거워해라. 그리고 무엇보다 항상 겸손해라, 젊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그래야 지식이 늘고 주변에 사람이 많아진다.”


 소주가 맹물 같았다. 목구멍을 넘어갈 때 톡 쏘는 맛이 느껴지지 않는 소주라니! 젊은이들에게는 맞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다. 뭔 놈의 소주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젠장, 어디에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더니. 한 번도 내가 노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도 17도짜리 소주를 보니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도 삼촌과 함께 3병을 마신 조카의 얼굴은 발갛게 물들었다.


 <후기>

 요즘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몇 년 전 만해도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인구에 회자되었었습니다. 그때도 전혀 공감하지 않았는데, 그 배경에 조카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보는 조카들은 밝게 지낼 뿐 아니라 활력이 넘쳤습니다. 미국에 사는 아이들이 오히려 가엾게 생각되었습니다.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휴가를 내 뉴질랜드에서 사귀었던 핀란드 친구를 만나러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다녀오고, 추석 연휴 때는 유럽을 다녀오기도 합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상상할 수 없던 일입니다.


 아무리 큰 것도 더 큰 것 옆에서는 작아 보이고, 아무리 작은 것도 더 작은 것 옆에서는 커 보입니다. 좋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더 좋고 조금 덜 좋은 것뿐이지, 절대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은 아닙니다. 지금 가진 것이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어도 누군가에게는 소망입니다.


 비교하지 말고 현재 있는 그곳에서 열심히 즐기시고 충분히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지난 반세기 이상을 열심히 산 우리들의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법륜의 설법을 인용했습니다, 하하하.


▼ 내 아이들과 함께 찍은 조카의 돌 사진.


매거진의 이전글 쓰레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