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충무공과 세종대왕을 일컫는데 이견은 없을 것이다. 누란의 위기에서 뛰어난 지휘와 전략으로 나라를 구한 공로와, 일반 백성들이 무식해야 통치하기 쉽다는 당대 기득권인 사대부의 주장과 반대를 무릎 쓰고 한글을 창제한 업적이 어느 무엇보다 찬란하기 때문이다. 두 분 중에서 한 분을 선택하라면 단연코 충무공인 것은 그가 겪은 고난의 길이 왕실의 그것과는 비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에 들어가 한글을 깨치고 나면 누구나 먼저 손에 잡는 게 위인전이다. 충무공과 세종대왕 편을 읽고 외국인으로 첫 번째 접하는 인물이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이 아닐까. 공부에의 집념으로 가난을 극복하고 흑인노예를 해방시킨 위대한 인류애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 대통령으로 기억하게 된 것도 그때 읽은 위인전 때문이다.
하지만 가난한 평민 출신으로 그가 얼마나 조롱과 비웃음을 견뎌야 했는지, 그의 인생이 얼마나 불행했는지에 대한 글을 본 기억은 없다. 링컨의 불행한 인생과 함께 전쟁 초기의 불리한 전세를 뒤집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에서는 충무공의 업적과 흡사하고, 노예해방으로 아프리카인들이 짐승과 같은 처참한 상태를 벗어나게 한 것은 백성을 무지로부터 구한 세종의 치적을 닮았다.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링컨을 거론하는 이유를 분석한다면 한국이 처한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지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게 글의 의도이다.
남북전쟁은 엄밀히 말하자면 일종의 내란이다.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링컨의 대통령당선에 반발한 남부연합이 미합중국에서의 탈퇴를 선언하고 독립을 주장하자, The United States에서의 분리를 용납할 수 없다는 논리로 시작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실제 미합중국의 표기도 전쟁 전후로 바뀐다. ‘The United States are ~’로 복수였던 표기가 전쟁 후에는 ‘The United States is ~’ 단수로 변해서 하나의 나라라는 의미를 더 강조하게 되었다.
비록 내란이었다고 하더라도 그야말로 총력전이었고 세계사에 기록된 최초의 현대전이기도 했다. 전투기와 탱크만 출현하지 않았을 뿐 정확도가 재래식 총기와는 비할 수 없게 발전했고 수동식이기는 하나 기관총까지 동원되었던 최초의 전쟁으로 70만 명 이상의 인명이 죽거나 다친 총력현대전에 가까웠다.
어렸을 때 ‘6·25사변’이라고 배운 한국전쟁도 엄밀히 따지면 같은 민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라는 점에서 내란이다. 학교에서 배운 것에 따르면 북한은 나라가 아닌 괴뢰(소련의 꼭두각시)이었고 김일성은 괴뢰집단의 괴수(怪獸: 짐승의 우두머리)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북한에서도 똑같이 가르쳤다는 건 불문가지다. 남한은 미제국주의의 괴뢰집단이고 이승만은 그들의 앞잡이이자 우두머리라고.
남북전쟁이나 한국전쟁이나 전쟁을 일으킨 쪽의 목적은 비슷했다. 분열된 나라를 하나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노예제도 찬반 때문에 스스로 갈라진 것이고, 한국은 미·영·소라는 강대국에 의해 쪼개진 것이었다. 미국은 외세의 개입이 없이 한쪽의 승리로 끝났으나 한국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외세의 적극적 개입으로 휴전되었다. 미국은 북군이 승리했으나 한국은 패자만 있었을 뿐 승자는 없었다. 한쪽은 이민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였으나 다른 쪽의 전쟁은 같은 민족 사이에 벌어진 동족상잔이었다.
1776년 독립선언 후 100년도 안 된 1861년 발발하여 4년 동안 계속된 남북전쟁이 끝나고 미국이 하나의 국가로서 단단히 결속된 배경에 링컨의 화해정신과 용서가 있었다. 그는 패배한 남군 모두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남부연합의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는 물론 북군을 가장 괴롭혔던 남부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까지. 그들에 의해 죽고 고통받은 수많은 병사를 생각하면 부처님과 같은 자비심을 가졌더라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링컨의 정신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수많은 나라에서 이민 온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미국을 하나로 단결시켜 강한 국가로 발전시키는 기본 동력이 되었다. 미국인들이 ‘USA’라는 구호에 왜 그토록 열광하는지는 링컨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미국은 하나라는 구호다. USA는 미국을 구성하는 이민족의 서로 다른 문화적 차이를 녹여버리는 용광로 같은 역할로 그 정신은 링컨에게서 출발했다.
그에 반해 남한과 북한은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1945년 이래 70년 넘도록 용서와 화해가 없었다. 몇 번의 시도가 있었더라도 지속하지 못했다. 이해는커녕 어떻게 하면 상대보다 더 강하게 비난하고 더 심하게 증오할까를 경쟁했다. 반공도 모자라 승공이라고 했고 그것도 부족해서 멸공을 부르짖었다. 서로를 괴뢰도당이라고 손가락질했고 원수로도 모자라 ‘원쑤’라고 악을 썼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옛말은 최소한 남북 사이에는 통하지 않았다. 물과 같은 미국은 화해와 용서의 정신으로 하나로 결속되었는데 반해, 핏줄로 이어진 단일민족은 화해보다는 분쟁을, 용서보다는 증오를 정권유지의 도구로 삼았다. 심지어 영토, 인구와 주권이라는 국가의 3요소를 멀쩡하게 갖추고 있음에도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며, 지구상 190여 나라 가운데 유일한 주적(主敵)이 바로 남한과 북한이었다.
모든 문제해결의 출발점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다. 어떤 뛰어난 의사라도 질환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 장구한 세월 동안 치료했어도 효과가 없다면 병의 진단을 바꿔서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병이 저절로 나을 거라는 주장(북한 붕괴론)도, 병만 나으면 V-라인 얼굴과 S-라인 몸매가 될 거라는 주장(통일 대박론)도 돌팔이의 진단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150년 전 남북전쟁이라는 내란의 후유증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최고의 방법으로 치료한 링컨에게서 배워야 하는 이유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한국의 6·25사변과 같을 수는 없다. 가장 큰 차이는 한국은 일본의 통치 아래 있었다는 것이다.
혹자는 한국을 프랑스와 비교하곤 한다. 독일점령 동안 나치에 협조했던 프랑스인을 처단했던 것처럼 해방 후 친일파 숙청에 실패한 것에서 문제를 찾기도 하지만 동의하기 힘든 주장이다. 36년은 프랑스의 4년과는 비할 수 없는 긴 시간이다. 게다가 한국은 전쟁에 져서 점령당한 것도 아니다. 일방적이고 불법적인 과정이었다고 하더라도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라는 형식적 절차를 거쳐 나라를 갖다 바쳤다.
다시 언급하지만 36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부당하고 불평등한 수탈까지 당하면서 일제에 협조하지 않고 어찌 살 수 있었을까.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고 자의가 아니었을 뿐이지 일제 치하에서 왜놈들에게 협조하지 않고서 끝날 것 같지 않은 36년을 어찌 견딜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짚고 넘어가야 할 것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하려면.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