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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Jul 22. 2018

링컨에게 배우는 교훈 - 하프타임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부귀영화를 누렸던 사람이 있다. 제5대, 6대 대법원장을 지낸 민복기 씨다. 삼권분립의 한축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을 10년 2개월을 지내 역대 최장수 대법원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법무부 차관과 검찰총장은 물론 세 번의 법무부 장관 임기까지 마쳤으니, 대한민국 역사상 이 같은 기록을 가진 분은 전에도 없었으며 후에도 없을 것이다.


 1913년 12월에 태어나 2007년 7월에 사망함으로써 만 94세까지 살았을 정도로 장수하였으며, 남아선호 사상이 대단했던 시절에 3남을 두어 법조인과 사업가로 길러냈으니 다복한 집안의 훌륭한 가장이었다. 뿐만 아니다. 전형적인 수재로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법학부 재학 시절 사시의 전신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태평양 전쟁 전인 1940년 경성(서울) 지방법원 판사에 취임하였다.


 타고난 사주팔자가 그보다 좋을 수 없던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에서 김재규가 쏜 총에 쓰러지기 10개월 전인 1978년 12월 65세로 관직에서 물러날 때는 최고의 국민훈장인 무궁화장을 수여받았으며 죽어서도 국립묘지에 안장된 것으로도 증명된다. 전두환 정부에서는 국정자문회의 위원이 되었고 2000년에는 ‘자랑스러운 서울대 법조인’으로 선정되어 부와 권력과 명예를 동시에 지니게 된 것도 대통령이나 재벌이 부럽지 않다.


 그 인생만큼이나 조국과 민족에도 기여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최근에 이르러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독립된 사법부의 수장으로서 법의 정신에 근거하지 않고 정권의 입맛에 맞는 판결을 했기 때문인데, 그 원조가 바로 민복기 씨다. 양승태 씨는 상고법원을 만들어 집단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명분이라도 있지만, 민복기 씨는 개인의 입신양명과 본인의 안위만 생각했다.


 해방 이전에는 판사로서 독립운동가를 재판으로 투옥시켰으며 1975년 4월 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연루된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겨우 18시간만에 집행하여, 사법살인을 자행한 장본인으로서 국제법학자협회가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까지 선포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곡학아세의 처세는 그의 부친인 민병석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요, ‘모기 발의 워커’에 불과하다.


 1858년생으로 동갑이자 절친인 이완용과 함께 한일병합 서류에 서명한 경술국적 8인의 한 사람이다. 이완용과 함께 청나라에 붙었다가, 러시아가 강할 것 같으면 친러파가 되었다가, 노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인사로 변한 카멜레온 인간이었다. 철새라며 비난받는 요즘 정치인의 원조가 바로 이들이다.


 1940년에 죽어 83세까지 장수한 이분은 요즘으로 치면 백세까지 산 셈이다. 게다가 차남 민복기가 경성에서 판사질 하는 것까지 보고, 일본이 패망하는 꼴은 못 보았으니 개인적으로는 축복받은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축복받은 인생이 있다면 그 반대도 없을 수 없다.


 1862년에 태어나 1927년에 돌아가신 조마리아 여사(천주교 세례명)는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다. 이완용, 민병석과 동시대의 분이지만 그들과 대척점의 인생이었다. 장남의 목숨을 조국의 독립운동에 바쳤으며 남은 자식이나 손자들도 민복기 같은 이들에게 고초를 겪거나 살해당했다. 아들을 바치고도 평생을 독립을 위해 헌신했고 죽어서는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과거 우리는 안중근 집안이라는 이유로 왜놈에게 죽어야 했죠. 광복 뒤에는 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한 놈들이 권력을 잡아 그때와 다를 것 없습니다.”

 안중근의 조카 안민생이 사촌 동생 안경옥에게 보낸 편지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모두 조마리아 여사의 자손들이다. 심지어 안중근 의사의 유일한 아들은 7살에 왜놈의 밀정에 의해 독살되었다.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여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 대위로 활동한 장준하 선생이 생전에 만주군 장교를 했던 분에게 했다는 말이다.

 “3천만 민족 누구나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 딱 한 사람만은 절대 대통령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바로 박정희입니다.”

 1918년생의 장준하 선생과 1917년생의 박정희 대통령은 동시대의 사람이었지만 선택은 전혀 달랐다.


 한분은 평생을 한마음 한뜻으로 살았고 다른 분은 그때그때 시류에 따라 변절했다. 변절한 사람들은 살아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죽어서도 국립묘지에 묻히는 영광을 누렸으나, 올곧았던 사람들은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 온갖 고초를 겪었으며, 죽어서도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고 기념할 무덤도 없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신의 집권 기간 동안 민복기 씨를 장관부터 대법원장까지 중용한 것도 초록은 동색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은 것이야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불공평한 것을 바로 잡는 일은 후손의 책무가 아닐까.


 - 여수 시립 도서관에서 어느 여름날 오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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