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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Sep 10. 2018

최저임금과 자동화 (3)

UBI란?

 UBI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특히 지난 수십 년 동안 가게에서 혹은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던 우리 노땅들에게 더 어렵다. UBI는 일정 나이가 되는 모든 국민에게 무조건 지급하는 기본소득이기 때문이다. 실업수당이 아니다. 그 나라에 태어난 것만으로 기본소득을 받을 자격이 부여되는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을 견딘 자영업자나, 죽기보다 나가기 싫은 직장을 다니며 벌어먹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기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도 말씀하지 않았던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어떻게 일도 안 하는데 소득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 세대에게 ‘논다’는 것은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다.


 세상이 변했다. 자동화와 로봇으로 죽기보다 싫은 직장을 다니고 싶어도 다닐 곳이 없고, 무례한 손님에 괴롭힘을 감수하더라도 할 수 있는 자영업이 사라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이디어나 기술개발도 물론 중요하다. 큰 보상을 받아 마땅한 일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것이 수많은 사람의 일자리를 없애고, 엄청난 대가가 불과 몇 명에게만 돌아간다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아마존 제프 베조스의 아이디어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국가나 사회 구성원이 없다면 1,600억 달러가 넘는 부를 이룰 수는 없다. UBI를 실행하려면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다. 도대체 그 재원은 어디서 올까. 바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답을 제시했다. 자동화 또는 무인화로 일자리를 없애고 막대한 소득을 올리는 사람들에게 과세하는 것이다.


 부자에게 중과세하는 것은 이미 복지로 유명한 북유럽 국가에서 실행하고 있다. 미국에서 UBI를 주장하는 정치인은 버니 샌더스만이 아니다. 민주당원이자 기업인으로 2020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경선에 도전하는 대만계 정치인으로 ‘Andrew Yang’이 있다. 그는 18세에서 64세 사이의 모든 미국 시민에게 천 불의 UBI를 지급하는 것을 미국 최초로 선거공약으로 정했다.


 UBI는 ‘Universal’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제프 베조스부터 뉴욕의 홈리스까지 모든 국민에게 주는 돈이다. 제프에게는 껌값도 안 되겠지만, 홈리스에게는 아주 요긴한 돈이다. 앤드류가 대선후보가 될 가능성은 적겠지만, UBI에 대해 널리 알리는 계기는 될 것이다.


 언젠가 한국에서 일률적인 아동수당을 반대하는 당이 있었다. 삼성 이재용의 자녀들에게까지 수당을 준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논리였다. 말도 안 되는 억지 트집이었다. 이재용 같은 사람에게 크게 거두어 ‘새 발의 피’만큼 돌려주는 것인데 뭐가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이재용에게는 과자 부스러기만도 못한 돈이지만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에게는 요긴한 돈이 아닌가.


 저소득자에게 주어지는 최저생계비도 마찬가지다. 주는 게 목적인지 핑계를 찾아 안 주는 게 목적인지 헷갈린다. 호적에 직계 자손이 있으면 안 되고, 자식이 있으면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등 조건이 까다롭다. 송파 세 모녀 자살과 유사한 사건이 끊이지 않는 까닭이다. 이런 사람들은 성격조차 착해서 공무원에 대들거나 싸우지도 못한다.


 임대료만으로 월 소득 1억이 되는 사람들, 하루 저녁에 술값으로 천만 원을 예사롭게 쓰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면 될 일이지, 핑계만 있으면 안 주려고 할 일인가. UBI 같은 복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주장하는 논리가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다.


 정말 웃기는 어불성설이다. 최저생계비에 의지하는 삶에 도덕적 해이가 끼어들 여지가 있을까. 그것은 ‘Better Life’를 향한 인간의 본능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도덕적 해이란 퇴폐와 향락을 의미하고, 그것은 임대료를 4배나 올리는 건물주와 하루 저녁에 술값으로 천만 원을 쓰는 가진 자의 전유물이다. 경영권 승계를 위해 국민연금에 수천억의 손실을 끼친 삼성 이재용 같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시민들은 일할 필요가 없었다. 생계에 필요한 모든 일은 노예가 담당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하여 인문학 전성기를 맞이하고 오디세이 같은 명작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남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칼 마르크스가 역작 ‘자본론’을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은 엥겔스라는 유한 자본가를 만나 경제적 지원을 받았기에 가능했다. 만약 마르크스가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면 자본론은 탄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았다.


 역이민 카페를 만들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두고 책을 읽거나 뉴스를 보며 1,500개가 넘는 글을 쓸 수 있던 것도, 경제활동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시간이 많았던 최근의 일이다. 과거에는 시간이 나면 쉬거나 컴퓨터에 관한 책을 보며 직업과 관련된 일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다. 미국에 살며 생계를 위해 식당에서 접시라도 닦아야 했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직도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도널드 트럼프를 미국의 구세주로 생각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옛날 군 복무 시절 자주 듣던 말이 있다. 졸병들은 잡아 돌려야지 놀 시간을 주면 사고(事故)가 난다는 것이다. 사고(思考)의 동물인 인간을 사고하지 못하게 하면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군대에서 원하는 인간이 바로 시키는 대로 아무런 불평 없이 따르는 노예이기 때문이다. 삼성의 이재용이나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가 원하는 인간도 비슷할 것이다. 모든 경영자나 자본가는 사고하는 인간보다는 프로그램된 대로 움직이는 자동화나 로봇을 더 선호하는 배경이다.


 20세기 최고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며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버트란드 러셀’의 1935년 저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In praise of idleness)’에 나오는 예를 인용한다. 한 해에 일억 개의 핀을 만드는 회사가 있다. 일억 개의 핀은 전 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양이다. 회사 경영자가 종업원의 도움으로 설비를 크게 개선해서 생산성을 두 배로 개선했다. 그는 직원들의 노동시간을 반으로 줄이고 같은 봉급을 줄까? 천만의 말씀이다. 노동시간을 줄이는 대신에 절반의 직원을 해고하는 선택을 할 것이고 그들에게 주어질 돈은 자신의 잉여소득이 될 것이다.


 돈이 권력이자 가장 강력한 무기인 자본주의, 그것도 시장 원리에 근거한 경쟁 사회에서 정부의 도움마저 없다면, 그 옛날 그리스 아테네 체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돈 가진 시민과 돈에 굴복한 노예, 두 종류의 인간만 존재하는 사회로 말이다. 아테네 시대에 시민이 되는 자격은 엄격히 제한되었다. 부모 모두가 시민이어야 했으며, 외국인은 절대로 시민이 될 수 없었다. 현재도 비슷하다. 양극화가 심해지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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