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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Oct 22. 2018

치악산

치악산의 가을

 지난 19일 금요일이었다. 부천 소풍 터미널에서 원주까지 정확히 2시간이 걸려, 원주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린 시간은 9시 30분이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자원봉사를 하는 듯한 노인이 보여 치악산을 어떻게 가는지 물었다. 30번대 버스를 타고 구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41번이나 41-1번으로 갈아타라는 설명이 아주 친절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기사에게 치악산에 가려면 어디에서 내려 갈아타느냐고 물었더니, ‘잘 물어보셨습니다. 정거장에 세우고 알려드리겠습니다.’라는 친절한 답변이 모르는 길을 나선 나그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 얼마나 좋은 나라인가, 가는 곳마다 이렇듯 친절한 사람을 만나고 모르는 사람조차 서로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내리는 등 뒤로 기사의 인사말이 정겹게 들렸다.

 “치악산 잘 다녀가세요!”


 정류장에는 가벼운 배낭을 진 늙수그레한 부부가 먼저 와 있었는데, 바깥 노인이 버스 도착 시각을 살피는 내게 말을 건넸다.

 “치악산에 가세요.”

 “네”

 “우리는 세렴폭포까지 가는데 어디까지 가세요?”

 “글쎄요, 정상까지 가려고 하는데요.”

 “예, 정상요? 보아하니 60은 넘으신 것 같은데 거기는 힘들어서 못 가요. ‘악(岳)’자가 들어가는 산이잖아요. 경사가 5~60도나 되고 마지막에는 7~80도로 거의 수직에 가까워요. 젊은 사람들도 힘들어서 올라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한라산보다 힘듭니까?”

 “그럼요, 훨씬 힘들어요.”

 “얼마나 걸리지요?”

 “세렴폭포에서 올라가는데 3시간, 내려오는데 2시간 반은 잡아야 합니다.”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분과의 대화는 버스를 타고 종점인 치악산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며 겁을 잔뜩 들게 했다.


 버스에서 내린 시간은 10시 반이었다. 돌아갈 때는 여주로 해서 전철을 탈 생각이었기에 마음이 급했다. 입구에서 구룡사를 지나 세렴폭포까지 가는 길은 평탄해서 주변 경치를 즐기며 걷기에는 최적이었다. 산행에 적절한 날씨는 전형적인 가을의 모습으로 기막히게 좋았다. 치악산 정상 비로봉으로 향하는 길은 세렴폭포 못 가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곳부터 비로봉 왕복에는 5~6시간이 걸리며 매우 어려운 코스라는 위협(?)적인 경고문이 보였다.


 투지가 불끈 솟았다. 오케이, 2.7㎞에 불과한 비로봉이 얼마나 힘든가 보자, 얼마나 걸리는지도. 사진 찍는 거로 시간 기록을 대신했다. 11시 17분! 두 갈래가 나타났다. 오른쪽은 계곡, 왼쪽은 사다리병창길이다. 앞선 사람을 따라 왼쪽을 택했다. 곧바로 45도가량의 가파른 경사의 계단이 끝없이 나타났다. 금방 숨이 턱에 받혔다. 어제 비가 왔는지 길 위에 떨어진 낙엽은 젖어 있었고 냄새는 향긋했으며 공기는 상쾌했다.


 첫 번째 이정표가 나타났다. 한참 오른 것 같은데 겨우 500m를 걸었을 뿐으로 2.2㎞가 남았단다. 지금까지의 다섯 배를 더 걸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평일이라 사람은 별로 없었다. 앞에서 걷는 40대로 보이는 부부를 추월했다. 1.7㎞ 남았다는 두 번째 이정표가 나타났다. 1㎞를 걷는 데 50분가량 걸린 셈이다.


 ‘사다리병창길’이라는 코스가 나타났다. 칼날처럼 좁은 능선에 쇠말뚝을 박고 계단을 설치했다. 어떻게 했을까? 그 재주가 놀라웠다. 기막힌 경치가 좌우와 뒤로 보였다. 입에서는 단내가 풀풀 났다. 잠시 숨을 고르고 경치도 감상할 겸 물을 마셨다. 아뿔싸, 물이 부족했다. 시외버스를 타기 전에 산 옥수수수염 차가 전부였다. 배도 고팠다. 옥수수수염 차를 사면서 샌드위치 하나 먹은 것뿐이었고, 아침 일찍 급히 나오느라 챙긴 것도 없었다. 오늘 체중 좀 줄겠네!


 300m가 남았다는 표지가 보여 정상을 바라보니 까마득하게 멀어 보였다. 젠장, 저렇게 먼데 300m라고! 버스의 노인이 7~80도 수직에 가까운 경사라고 겁을 주던 계단이 나타났다. 50도는 충분히 넘을 것 같았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곳이 있으랴! '치악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삼복더위에 혀를 빼문 삽살개처럼 입을 벌리고 헉헉거리며 올라 마침내 정상에 다다랐다. 13시 15분경으로 두 시간 걸린 셈이다.


 정상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들은 삼삼오오 가져온 음식을 먹으며 기념촬영에 바빴다. 나도 비로봉 팻말에서 증명사진을 찍고 남은 물을 전부 마시는 것으로 음식을 대신했다. 하산길은 계곡을 택했다. 100m가 더 멀어 2.8㎞다. 계단이 올라온 곳보다 훨씬 적어 보였고, 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정겨워 하산길의 동행이 되었다.


 오르기는 쉽지만, 힘이 들었고, 하산은 힘은 들지 않았지만 어려웠다. 오를 때는 내가 추월했을 뿐 나를 추월하는 이가 없었으나, 하산길은 몇 사람에게 길을 내주면서, 올라올 때 보았던 가게의 막걸리를 생각하며 천천히 걸었다. 세렴폭포에서 비로봉까지 2시간이, 하산에는 1시간 40분이 걸렸으니까, 정상에서 머문 10분까지 포함하면 산행에 걸린 시간은 총 3시간 50분이었다.


 3㎞도 못 되는 비교적 짧은 코스지만 경사가 급해서 힘들었다. 천천히 산행한다면 5시간이면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100m라도 긴 계곡 코스로 올라갔다가 ‘사다리병창길’로 경치를 내려다보면서 하산하는 게 좋을 듯하다. 등산로 입구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주점으로 들어가서 막걸리와 더덕전을 시켰다. 꿀맛이란 이런 맛을 말하겠지.


 시간이 너무 늦어서 여주를 경유해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금요일 퇴근 시간이 겹쳐 길이 막히는 바람에 막차를 겨우 집어 타고 부천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전화기의 만보기 앱에는 54,340보를 표시하고 있었다.


▼ 터미널 앞 버스 정류장에 치악산 가는 방법이 잘 적혀 있어서 물어볼 필요도 없었으나, 문제는 한일주유소라는 정류장은 옛날 이름이었다. 지금 있는 것은 알뜰주유소다.


▼ 보다시피 '어려움'과 '매우 어려움'으로 코스 색깔이 표시되어 있다.


▼ 구룡사 입장권 매표소를 겸한 등산로 입구. 이곳을 통과한 시간은 10시 35분.


▼ 구룡사 근처 은행나무의 노란색이 가을 하늘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 등산하는 사람에게 겁을 주는 안내판


▼ 이 다리를 건너면서 힘든 코스가 시작된다.


▼ 다리를 건너자마자 거의 45도에 육박하는 계단이 끝없이 나타난다.


▼ 한참 걸은 것 같은데 500m에 불과했다.


▼ 앞서가는 부부를 추월했다.


▼ 하산할 때 이용하면 경치를 구경할 수 있겠다.


▼ 사다리병창길 양쪽에 보이는 경치가 삼삼하다.

▼ 300미터 남았다는 표지. 마지막 힘든 고비다.


▼ 마침내 정상에 섰다.


▼ 어묵, 더덕전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며 산행의 피로를 말끔하게 풀었다.


▼ 1982년 치악산에서 찍은 사진을 찾아보았다. 왼쪽은 세렴폭포에서, 오른쪽은 비로봉에서. 이처럼 풋풋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추억하면 미소가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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