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정신없이 시간이 간다. 손발을 놀리는 노동이지만 일에 열중하다 보면 시장기 때문에 점심때가 된 것을 깨닫고, 귀가하는 학생들을 보고 끝낼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쯤이면 허리도 아프고 손가락과 무릎에도 통증이 온다. 과거 사무실에서 일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환경이다. 바쁘고 긴박한 일로 긴장 속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쩌다 있는 일이고, 평상시 한가할 때면 시계를 쳐다보며 퇴근시간을 지루하게 기다렸었다. 그리고 정해진 날에 정해진 금액이 은행계좌로 꼬박꼬박 입금되었다.
지금 하는 노동은 전혀 다르다. 정해진 기간 내에 정해진 양을 마쳐야 하며, 그것도 수도계량기 한 건에 만 4천 원이 주어질 뿐이다. 쉬운 것은 30분이 채 안 걸리지만 어려운 것은 한 시간으로도 부족하다. 제주 친구 P와 함께 많게는 20개에서 적게는 열두어 개를 하루에 설치하려면 여유를 부리거나 다른 생각할 틈이 없다. 지난 30년이 넘도록 사무실에서만 일했으니 이런 경험이 나쁘지만은 않을뿐더러, 일에서 배우는 깨달음도 적지 않다. LA에서 했던 에어컨 일처럼 무덥지도, 위험하지도 않다. 피곤한 탓인지 뉴스가 채 끝나기 전에 곯아떨어지는 것은 덤이다.
일의 성격상 가가호호를 방문한다. 아무도 없는 집도 있고 젊은 주부들도 있으나 대부분 노인들이 집을 지킨다. 보행기의 아기에게 젖병을 물리고 있는 노인도 있고, 길 한편에서 케이블 작업을 하고 있는 내게 다가와 말을 거는 노인들도 있다. 보통 70대 중반에서 80대의 노인들이다. 때로는 90이 넘어 보이는 노인들도 있지만 귀가 어두워서 그런지 대화가 쉽지 않다.
잘 꾸며진 정원이 있는 커다란 집에는 과거 제주도 교육감이었다는 노인과 부인이 살고 있다. 공사장 인부나 다름없는 우리를 대하는 자세와 말투에도 교양과 품위가 느껴졌다. 부부가 어떻게 저토록 닮았을까. 모시 타래처럼 하얗게 센 머리가 보기 좋았다. 어떻게 저토록 품격 있게 늙었을까. 바깥 노인은 바깥 노인대로 안 노인은 안 노인 대로 취미생활을 하며 놀러 다닌다는 사실은, 내가 하는 일을 하릴없이 쳐다보던 이웃 노인이 귀띔을 주었다.
이런 노인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눈과 입꼬리에 심술이 잔뜩 묻어있는 노인도 자주 본다. 제주 시청에서 하는 일인데도, 필요 없다며 설치하지 말라는 노인도 있고, 왜 남의 집 담벼락에 붙이냐고 시비하며 이웃과 싸우는 노인도 있다. 왜 어떤 노인은 보기 좋게 늙고 어떤 노인은 추한 모습으로 나이를 먹을까.
최근에 목격한 추한 모습의 노인은 전두환의 부인 78세의 이순자 여사다. 최근에 그녀는 '당신은 외롭지 않다'라는 제목의 자서전에서 '우리도 5·18 희생자'라고 주장했다는 기사와 함께 매스컴에 등장했다. TV 화면에 나타난 그녀의 심술이 가득한 얼굴을 보며, '어떻게 저렇게 흉측한 모습으로 늙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다큐를 즐겨보는 탓에 TV에서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런 분들 중에는 철없던 학생 시절 (무례하게도) '공순이'라고 폄하했던 분들도 있다. 세월이 만들었을까? 그분들에게서 더 이상 공순이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귀티마저 있어 교양과 품위가 느껴지는 중년 부인의 모습이다. 이순자와 공순이의 모습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권위가 대단했던 전두환 군사독재시대에서도 이순자 씨는 더욱 대단한 권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오죽하면 '학사 위에 박사, 박사 위에 육사, 육사 위에 여사'라는 조크가 인구에 회자되었을까.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속일 수 있어도 속일 수 없는 두 존재가 있다. 자기 자신과 하느님이다. 자신의 위선적인 삶을 그녀 스스로는 속일 수 없었을 것이고 그런 모순된 인생이 현재의 추한 모습을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반면에 공장에서 공업용 미싱을 돌렸던 아주머니는 열악한 환경일지라도 진솔한 삶을 살았음에 틀림없다. 비록 초라해 보였으나 거리낄 것도 숨길 것도 없는 진실한 인생이었다는 것은 그녀의 환한 웃음이 증명한다. 목젖이 보이도록 스스럼없이 웃는 모습은 보는 사람마저 즐겁게 한다. 가식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미소이기에 그렇다.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인생과 진솔한 삶이 만들어낸 차이가 아닐까. 세월이 그 차이를 빚어 지금의 얼굴을 만들었으리라.
부부는 닮는다고 했던가. 제주에서 만난 전직 교육감 부부와 전두환과 이순자 부부를 보면 맞는 말이다. 2003년 법원 심리에서 "전 재산은 29만 원"이라고 했던 전두환의 증언이 '한국인이 뽑은 용서할 수 없는 거짓말' 순위 4위에 올랐다. 곧 출간할 그의 자서전 '전두환 회고록'에서도 이순자 씨와 마찬가지로 광주학살은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는 거짓말로 일관할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 당시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 위치에 있던 자로서 책임회피에 급급한다는 것은 비겁하기 짝이 없다. 만에 하나 자신의 지시가 아니라 하더라도 실질적인 최고 통치권자로서의 책임이 눈곱만큼이라도 있다면 책임을 지는 것이 도리이자 사내다운 모습일 것이다. 거짓과 가식의 삶이 만들어낸 그의 늙은 모습도 추하기는 매한가지다. 웃어본 적이 없어서일까. 억지로라도 웃는 모습은 사용한 적이 별로 없는 얼굴 근육을 일그러트려 더 흉한 모습이 된다.
그런 웃음을 자주 보이는 사람이 또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지지자들에게만 간간히 보이는 웃음에는 자연스러움이 없다. 눈과 입에는 미소가 보이지만 표정에는 웃음이 없다. 불만과 저항만이 가득하다. 누구나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다. 그런 자신을 잘 알기에 조금이라도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그토록 성형시술에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무위자연(無爲自然)! 자연을 따르며 가식이 없는(無爲) 삶을 살아갈 때, 인생은 가장 아름답다는 진리를 일찍이 깨우친 선각자들이 말하지 않았던가. 먼지 투성이 공장에서 미싱을 돌렸더라도 그녀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무위자연을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았다.
아니, 언제 저렇게 꽃망울을 터뜨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