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찍 대신 다정함으로 나를 대하는 법
“It is an absolute perfection, and as it were divine, for a man to know how to enjoy his being loyally.” — Charles Cotton, The Essays of Montaigne
“자신의 존재를 성실하게 즐길 줄 아는 것은 하나의 완성이며, 거의 신성한 일과도 같다.”
오랫동안 우리는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방식으로 살아왔습니다.
조금 더 잘하기 위해,
뒤처지지 않기 위해,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늘 자신에게 높은 기준을 요구했습니다.
실수하면 곧바로 자책했고, 성과가 부족하면 스스로를 책망했습니다.
“더 잘했어야지.”
“왜 이것밖에 못했지.”
이 말들은 어느새 우리 안에서 가장 익숙한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그 엄격함 덕분에 우리는 많은 것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지치고 메마른 마음은 제대로 돌보지 못했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다그치는 삶은 잠시 빠르게 달릴 수는 있어도
오래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몽테뉴는 다른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완벽한 인간이 되려 애쓰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관찰했습니다.
건망증도, 변덕도, 약점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고쳐야 할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이해해야 할 존재로 보았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즐길 줄 아는 것.”
그는 그것을 가장 높은 경지라고 말합니다.
오십이라는 나이는
내 안의 엄격한 재판관을 조금 쉬게 해도 되는 나이입니다.
성취를 위해 사용하던 힘을 이제는 나를 보살피는 데 써도 좋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실수해도 괜찮습니다.
생각이 바뀌어도 괜찮습니다.
이 말은 변명이 아니라 자기 존중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자기 자신에게 가장 까다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는 조금 다른 태도를 배워도 됩니다.
실수했을 때 “왜 또 그랬을까” 대신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해 보십시오.
피곤할 때 “버텨야지” 대신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고 말해 보십시오.
그 작은 변화가 마음의 숨통을 틔웁니다.
자신에게 다정한 사람은 타인에게도 다정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사람은 타인에게도 쉽게 엄격해집니다.
오십 이후의 삶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나와 평화롭게 지내는 법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내가 나의 가장 든든한 편이 될 때 비로소 외부의 평가에 덜 흔들립니다.
자책을 내려놓은 자리에 잔잔한 자신감이 자라납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던 손을 거두고 따뜻하게 어깨를 토닥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과 같은 편이 됩니다.
그것이 남은 시간을 살아가는 가장 단단한 힘입니다.
[아리에르 부티크 : 스스로에게 다정해지기]
자책의 언어를 바꾸어 보십시오.
실수했을 때 자동처럼 튀어나오는 말을 의식해 보십시오.
“왜 이래” 대신 “괜찮아, 다시 해보자”라고 말해 보십시오.
당신이 자신에게 건네는 말이 곧 당신의 하루를 만듭니다.
아무 목적 없는 시간을 허락하십시오.
성과와 상관없는 일을 해보십시오.
산책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그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도 좋습니다.
존재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감각을 몸으로 느껴보는 연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