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덕질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덕후감 Aug 18. 2023

15화 - 벽지무늬 같은 하루들

수없이 다양한 형태의 벽지무늬들이 있다. 그 무늬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사각형이 일정한 크기로 반복되어 만들어진 걸 알 수 있게 된다. 그게 켜켜이 쌓인 하루의 일상처럼 느껴진 순간이 있다.


13살, 초등학교 6학년이던 나에게 그 순간을 알 수 있게 해 준 15번째 일기의 주인공은 바로 배우와 가수로 활동 중인 아이유(IU).


아이유(IU) / 출처 J.estina summer 화보


잠에서 깨어 눈을 뜨고, 밥 먹고, 씻고, 옷 갈아입고, 가방과 실내화 주머니를 챙겨 학교에 등교를 하고, 수업을 듣고, 끝나서 하교하면 집에 갔다가 다시 나와서 학원으로 향했다. 끝나면 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거나 편의점에서 사 먹고 돌아간 뒤, 밤이 되면 잠드는 그런 보통의 하루들이었다.

그때 원래도 좋아했던 아이유 언니의 신곡을 거리에서 듣게 되었다. 너랑 나가 막 나왔던 때였다. 타이틀곡부터 13번 트랙의 수록곡까지 거를 노래 하나 없이 모든 노래가 좋아서 그 앨범을 샀었다.


Last Fantasy 앨범 표지


이때는 벽지무늬가 찢어진 채로 하루들이 이어지는 나날이었다. 나랑 같이 놀고 떠들었던 친구들이 하나둘 곁을 떠나가고, 혼자 남았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왕따가 되어버린 후였다. 같은 학급인 반이 아니고 그 학년에서의 왕따였다.


체육시간이면 누구도 나랑 함께하기를 꺼려하고 피한다. 무시한다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만 빠진 채로 모두가 짝을 지어 운동을 한다. 다른 수업 때도 같이 조를 짜거나 같은 도구를 써야 되는 때면 어쩔 수 없이 아무 데나 끼기도 한다. 가끔 명령 같은 부탁도 받았다.


"야, 덕후감! 네가 건들면 네 다음 번호인 애가 너 때문에 오염돼서 도구 못 쓰게 되니까 그냥 하지 마. 한 척하고 가만히 있어."


그런 말을 듣고도 뭐라 할 수가 없었다. 학교라는 세상에서 홀로 견딜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담임선생님도 내가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지만 그 친구들에게 주의를 주고, 얘기하는 거 말고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말하지 않는 한은 선생님이 부모님에게 연락할 일이 없을 거라는 소리이기도 하다.


외로워도 참을 수 있었던 건 덕질과 노래 덕분이었다. 메말라서 더는 눈물도 나오지 않을 때 아이유 언니의 앨범에서 CD를 꺼내 플레이어로 들었다. 듣고 있으면 편안했다. 힘들었던 게 잠시 떠오르지 않을 만큼 좋았다.


그러다 다시 공감하고 기억을 떠올리며 눈을 감고 들었던 노래가 있다. 라망벽지무늬라는 곡이다. 라망은 '오늘 하루는 길을 걷다 비친 나의 모습이 초라해진 어깰 감싸며 조금 내 모습이 가여워 혹시나 달라지길 바라며 울어요'라는 가사가, 벽지무늬는 곡 자체로 울림의 파도를 만들었다. 물론 멍하니 들을 때도 많았다. 그만큼 감정이 닳고 닳아서 제 기능을 못했던 거 같다.


위로가 받고 싶을 때나 잠시 쉬고 싶을 때 별을 찾는 아이Everything's Alright을 들었다. 듣다 보면 잠깐이라도 이 찢어진 벽지무늬를 원래대로 돌릴 수 있는 희망이 느껴졌다. 그런 희망을 느끼며 더 악착같이 버텨냈다. 분노를 드러내고, 발악하면서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인간극장 노래를 내 귀에 대고 틀어서 비웃고, 인간쓰레기에, 스토커 취급하고, 바이러스 마냥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괴로워서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살고 싶어서 붙잡은 게 아이유라는 안전띠였다. 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보고 그런 눈을 하거나 욕을 하지 않는 안전한 존재라고 느끼게 된 것이다.


나에게 있어 아이유 언니는 길 잃은 강아지에게 눈길 한 번, 손길 한 번으로 온기를 준 사람인 것이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떠오르고,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다. 4AM, '해가 뜨면 흔적 없이 모두 잊혀지겠지'라는 가사가 내 생각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처럼 느껴져서 더 마음이 갔다. 이 모든 게 꿈이었고, 해가 뜨면 잠에서 깬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상상 말이다. 그랬어도 난 아이유 언니의 노래를 좋아했을 것이다. 언니의 노래가 내 취향이니까.


점점 이 벽지무늬에 끝이 보일 때, 학교를 벗어났다. 벽지무늬가 찢어졌어도 다시 붙이고 또 붙였다. 언젠가 다시 떨어지고 또 붙이다가 완전히 찢어질 수도 있겠지만 지겹게도 싫었던 그 하루마저 내가 살아온 날이기에 계속 붙이고 있다.


어쩌다 학교에서 놀러 갈 때였다. 걸어서 다 같이 이동하는데 손이 차가워지고 몸이 덜덜 떨렸다. 숨이 조금씩 가빠올 때 선생님의 쉬자는 한 마디로 계단에 주저앉아 숨을 천천히 골랐다. 핸드폰으로 음악방송을 틀었고, 마침 아이유 언니가 나왔다. (나중에서야 이게 공황발작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기하게 떨렸던 몸이 점차 나아지더니 괜찮아졌다. 울렁거리던 마음도 안정을 되찾았다.


찢어졌던 벽지무늬 위에 밴드가 갈라진 선을 따라서 붙여졌다. 아프더라도 괜찮길 바라며 붙여진 밴드는 아이유 언니의 노래였다. 괜찮지 않아도 노래가 들리면 다 괜찮아질 거라는 희망이기도 하다.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가 달라져도 다시 반복되는 게 삶인 것 같다. 분명 외롭고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많았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았던 건 다시 그 위로 쌓여질 벽지무늬가 궁금해서, 보고 싶어서였다.

찢어진 벽지무늬를 다시 본 지금은 덕질해서, 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안도감뿐이다. 앞으로 계속 쌓아갈 덕질의 벽지무늬들이 기대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14화 - 군전역과 함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