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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후감 Oct 29. 2023

네 번째 - 택배는 배움을 싣고

택배가 설렘을 준다지만, 택배는 받아야 정말로 기대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택배를 20년 넘게 받아보기만 했지, 보내본 적이 없었던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나마 해본 거라고는 반품 신청으로 인한 회수 시에 '반품'이란 두 글자를 적는 것 정도.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그걸 적는 것마저 헤매며 다다음 날에 기사님이 다시 회수하러 오셔야 했다.


그만큼 택배를 어려워 했고, 보내는 건 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게 되고, 팬아트를 그린 어느 날. 문득 그 그림의 주인공에게 택배로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완성한 팬아트


프린트를 해야 했는데, 집의 프린트기에 잉크가 없어서 근처 문구점으로 달려갔다.


프린트를 완료하고 파일홀더에 넣은 뒤, 그걸 들고서 우체국으로 간 나는 순간 벙쪄서 우두커니 서있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분주하게 물건을 바삐 포장하고 뭔가를 적고 있는 모습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어딜 가나 키오스크가 있는 게 당연했던 내 눈에는 사뭇 다른, 신기한 풍경이었다.


키오스크는 없고, 혼자 해야 하는데 알려주는 사람도 없어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한참을 우체국의 안과 밖을 오가며 서성거렸다.


사람들이 저마다 서서 무언가를 쓰는 걸 관찰하고는 나도 슬쩍 다가갔다. 운송장에 쓰일 부분들을 손으로 적는 거였는데,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에 대한 내용이었다.


소속사의 주소를 찾긴 했는데, 그걸 보고 써도 틀린 덕에 다시 한 번 더 쓰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틀리지 않고 완성했다.


그거 하나 하는데 서성거린 것까지 포함해 약 30분은 걸린 것 같다. 땀을 흘리며 다 쓰고 나서는 또 주변을 미어캣처럼 살피고 있었다.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보내려는 물건이 담길만한 상자를 고르고 물건을 넣어서 포장하기까지 했다.


A4용지를 담을 만한 크기의 상자를 찾기 위해 또 상자들과 열심히 눈싸움 했다.


눈싸움 끝에 210mm×297mm의 크기를 넘는 상자를 찾았다. 그 상자에 그림이 든 파일을 넣고는 뽁뽁이까지 같이 넣을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했다.


그 상태로 편지까지 넣고는 박스 테이프를 감았는데, 예쁘게 하고 싶어도 이미 기운이 빠진 터라 조금은 엉성했던 것 같다.


택배에다 또 써야 되는 줄 알고 택배 상자 위에다 주소, 번호, 받는 사람, 보내는 사람을 다시 적었다.


그렇게 적은 나는 1시간 만에 택배 접수를 하고, 결제까지 끝마쳤다.


1시간을 헤매고 허둥지둥하면서 배운 택배는 그래도 꽤나 뿌듯했다. 제발 이 택배가 잘 전해지길 바랐는데, 2022년의 겨울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낸 택배에 대한 응답이 도착했다.


그런 응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 했는데, 인증글을 올려주셔서 많이 놀랐었다.


그 뒤로 올해 4월에도 한 번 더 보냈었는데, 그때는 한 번 해봤다고 그래도 처음보다 40분이나 줄어있었다.


20분이라니, 두 번째 하는 건데 생각보다 빨리 끝내서 신기하고 뿌듯했다.


덕질이 아니었다면, 택배를 보내는 건 더 나중에 배웠거나 아예 모른 채로 넘어갈 수도 있었겠구나 싶었다.


택배에는 많은 물건들 속에 수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는 것 같다.


그 중에서 나의 첫 택배는 배움을 싣고서 내 애정과 떨림을 전해준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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