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덕후감 Nov 12. 2023

다섯 번째 - 김장은 야무지게 버무려야지

어제 김장을 하고 난 나는 간만에 깊이 잠든 것 같다.


겉절이, 수육. 굴생채

덕질로 김장을 배운 나는 집에서도 엄마의 설명이 조금 필요하긴 하지만, 한 통하고 반을 채울 만큼 버무릴 수 있게 됐다.


김장은 어느 아이돌 래퍼의 자체 콘텐츠 영상으로 배우게 되었는데, 무를 강판에 채를 썰고, 고춧가루와 마늘, 생강 등을 넣어서 갈며 직접 속까지 만들었을 정도로 자세했다.


이렇게까지 본격적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영상을 보며, "저는 김장에 진심입니다!"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날아가려는 정신줄을 붙잡고 다시 영상에 집중하자, 다 만든 속을 넓은 판에 붓고 있었다.


배추는 4분의 1 크기로 잘라져 있었고, 네 명의 옆에 차곡차곡 쌓였다. 한 눈에 보기에도 양이 많아 보였는데, 100포기 정도 되는 듯 했다.


1인 25포기씩이어도 양이 많긴 했다. 요령을 피우고, 힘들다고 포기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던 내 마음과는 다르게 다들 열심히 버무리고 있었다.


속을 잘 절여진 배추의 바깥쪽 잎부터 하나하나 채워주고 묻혀주면서 안쪽 잎까지 다 해주면, 통에 잘 접어서 하나씩 담는 걸 계속 반복했다.


처음에는 투닥거리고, 장난과 농담이 오고 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 대화도 하지 않았다. 집중한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지친 게 더 커보였다.


마지막 통에 마지막 김치까지 담아넣은 네 사람은 그제야 허리를 펴며 일어났다. 통의 뚜껑을 다 닫아주고는 누구에게 김치를 나눠줄 건지에 대해 각자 의논하기 시작했다.


부모님, 멤버들, 친구, 매니저 등등 다양하게 나왔고, 어느 정도 의논이 끝난 사람들은 김치통 위에 이름표를 붙이는 것 같았다.


앞치마를 두르고, 김장을 하는 네 명의 모습이 지금껏 봐온 영상들 중에서 가장 신선했던 장면이었다.


이 영상을 본 다음 해부터 나는 집에서 엄마를 도와 같이 김장하게 되었다.


영상에서 봤던 것처럼 똑같이 따라하고도 '그게 맞나?' 싶어서 엄마가 하시는 걸 눈으로 계속 바라봤다.


못미더워서 그런 건 아니지만, 1년이 지나서 하려다 보니 기억에 차이가 생겼을까봐 한 번 더 확인하고자 했다.


물론 이것도 변명 같지만, 아니다. 아무튼 아니다. 그 덕질은 내가 김치를 야무지게 버무릴 수 있도록 도와줬다.


신기한 덕질의 세계다. 누가 덕질로 김장을 배울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걸 내가 해내고 말았다니, 알 수 없는 덕후의 삶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네 번째 - 택배는 배움을 싣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