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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망 Jan 17. 2022

02. 내 실수를 용서하는 법

경남 김해

이 이야기는 본인이 2018.09.27~2018.11.02까지 직접 다녀온 전국 배낭여행을 기억하며 쓴 국내 여행 에세이입니다. 제 이야기를 통해 많은 분들이 참고 있는 여행의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소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챕터2

#2 내 실수를 용서하는 법




눈을 떴을 때 늘 보이던 내 방 천장이 아닌 낯선 천장이 보이는 것은 생각보다 괜찮은 경험이었다. 낯선 곳에서 잠을 잘 자지 못하는 편인데 공간 하나를 통째로 나를 위해 쓰는 경험은 외로웠지만 그만큼 자유로웠다. 그러나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했던가... 포근한 이불속에서 나오기 싫어 꾸물거리다가 여행 둘째 날부터 게으름 피우기는 싫어서 씻고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왔다.


햇빛이 골목을 비추자 어제와는 다른 풍경이 드러났다. 누가 봐도 이방인처럼 눈에 닿는 모든 것을 흥미롭게 둘러보며 우선 가방을 보관하기 위해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어제 종일 가방을 메고 다니다가 어깨가 빠질뻔한 뒤 짐은 가능하면 맡기고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갈아입을 옷과 세면도구, 기록을 위한 노트 정도만 들어있는 가방이 왜 이렇게 무거울까 생각이 들 정도로 묵직했다. 여행 초보자인 나는 돌아다닐 때는 가방을 맡기고 돌아다녀야 한다는 사실과 함께 중요한 짐들을 따로 들고 다닐 때 필요한 힙색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여행 둘째 날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천천히 여행이라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쪼렙여행자는 가방을 맡기고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었다



오늘 다녀올 주요 목적지는 바로 김해 <봉하마을>이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잠들어 계시는 곳이자 승효상, 고(故) 정기용 선생님과 같은 한국 건축 거장들이 설계한 작품들이 있는 곳으로 심리적, 공간적으로 많이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이지만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어 대중교통으로 가기가 쉽지 않았다. 봉하마을로 직행하는 버스는 내가 있는 곳에서 딱 한 대만 운행되고 있었고 그나마도 배차 간격이 길었다. 직행버스는 생각도 못하고 시내로 진입해 환승해 가는 버스를 한참 기다리며 심심해하다가 문득 방금 내 앞을 지나간 버스는 어디로 가는 버스일까 싶어서 검색해보았다. 오.. 마이.. 갓...!! 버스에 오르는 사람이 없어서 내 앞에서 멈칫거리다가 지나간 버스가 바로 봉하마을로 직행하는 그 버스였다! 분명히 인터넷에 게시되어 있던 시간표대로라면 직행 버스는 30분 전에 지나갔어야 했다. 이미 점이 되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직행 버스를 바라보며 다시는 버스 시간표를 맹신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평소라면 분명히 심술이 났을 법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금방 마음이 평온해졌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이동하니, 스스로의 실수를 용서하는 여유가 생겼다. 사실 나는 여유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흔히 사용하는 “여유 있어 보인다”,“너 여유 있나 보다.”와 같은 말들을 듣는 게 싫었고, 나도 상대방에게 그리 좋은 뜻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여행을 하며 느낀 ‘여유’라는 감정은 살면서 반드시 필요한 감정이며, 스스로의 실수를 용서하게 되고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틈을 주는 과속방지턱 같은 존재였다. 이렇게 나는 여행으로부터 천천히 하나씩 배우기 시작했다.


여유를 가지고 올라탄 버스는 직행으로 가는 버스와는 다르게 김해 시내를 누비며 한참을 돌아갔다.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과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풍경들이 있는 창밖을 바라보기만 해도 심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직행버스를 놓친 것을 감사하게 되었다. 사람 구경하는 재미에 푹 빠져 창밖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는데 유독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는 굉장히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는 신기하게 생긴 건축물을 보았다. 김해에 저런 건물이 있었나 싶어 검색을 해보니 최근에 지어진 <김해 서부 문화센터>였다. 건물이 화려하고 멋져 보였기에 여기서 내려 건물을 조금 구경하다가 갈까 생각했지만 지금 느끼고 있는 이 여유로움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건물을 직접 구경하지는 못했지만 흥미로운 건축물을 하나 알게 되었고, 언젠가 김해에 다시 방문한다면 분명히 생각이 날 것이다.



봉하마을에 도착했다!



봉하마을에 도착하여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님께서 즐겨 드셨다는 소고기국밥을 한 그릇 해치우고 천천히 마을을 걷기 시작했다. 마을의 입구에서 조문을 위한 하얀 국화꽃을 한 송이 구입했다. 국화꽃을 손에 들고 마을을 걸으며 눈에 닿는 모든 것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동안 잘 지냈는지 인사를 건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기분은 조금 업 되었지만 엄숙함은 유지한 채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님의 묘역 앞에 국화를 헌화하고 고개 숙여 인사를 드렸다.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 길에 아쉬움이 남아 가만히 서서 방문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사람들의 행동에 특징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묘역으로 가는 길은 사람들의 추모글이 새겨진 타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들은 이 글을 보기 위해 아래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걷게 되는데,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면 사람들이 묘역으로 가는 길에 굉장히 엄숙하게 고개를 숙인 상태로 묵념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또한, 묘역으로 향하는 길은 직선으로 만들었지만 나오는 길은 외곽으로 빼내어 사선으로 만들어 놓았다. 길을 사선으로 만들어 놓으니, 사람들은 묘역을 향하는 것보다 나올 때 시간이 더 걸리게 된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면 참배를 마친 사람들이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이대로 돌아가기 아쉽다는 듯이. 가만히 서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도중, 갑자기 짜릿한 감동과 함께 전율이 흘렀다. 분명 이것은 건축가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것이겠구나 싶어서.



(좌) 입구에서 구입한 하얀 국화 한 송이 / (우) 타일에 새겨진 글귀들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묵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내 다이어리에는 항상 시간 안에 마감해야 하는 일들이 가득했으니. 그러나 지금 내 다이어리에는 시간을 정해놓고 해내야 하는 일이 존재하지 않았고, 덕분에 한참을 같은 것을 바라보다가 발견한 장면이 나에게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내가 그동안 그토록 멀리하고자 애썼던 비효율적인 일들이 말이다. 내가 여태껏 중요하다고 믿고 있었던 모든 가치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홀가분했던 그 경험을 여행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



후배와 함께 마셨던 미숫가루



하루 만에 겪은 감동과 깨달음에 취해 혼자 실컷 걷고 생각하며 사색의 시간을 보낸 뒤 다시 시내로 돌아와 어제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기꺼이 나와준 후배를 다시 만났다. 평소에 학교에서 매일 보는 사이지만 여행 중에 만나니 감동은 배가 된다. 더군다나 여행의 시작의 순간을 함께 나누다 보니 더욱 고맙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함께 저녁을 먹고 요즘 핫하다는 김해 <봉리단길>에서 예쁜 카페를 찾아 커피를 주문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미숫가루를 주문했는데 예쁜 유리잔에 나올 거라는 우리 예상과는 달리 아주 투박한 쇠그릇에 얼음이 동동 띄워져 나왔다. 미숫가루가 나오면 함께 예쁘게 사진 찍자고 말했던 후배와 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눈을 마주친 뒤 한참 소리 죽여 웃었다.


즐거운 시간이 가고 헤어짐의 순간이 왔다. 후배는 학교가 있는 마산으로, 나는 다음 목적지인 부산으로 떠나야 한다. 먼저 떠나면 조금은 두렵고 쓸쓸한 내 뒷모습이 들킬까 봐 먼저 후배를 배웅해서 보낸 뒤 가방을 멘 두 손에 힘을 불끈 주고 부산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전국 30개의 도시, 100여개의 공간을 다녀왔습니다.

국내배낭여행을 계획하시는 분들에게 영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원고 제의 및 협업 요청은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작가 본계정 인스타 (@smg_dm)

쪼렙여행자 인스타 (@jjolevel_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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