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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윤 Dec 21. 2018

응고된 시간에 침을 바른다

일기는 매일같이 쓰여야 하는데



일기는 매일같이 쓰여야지. 그러면서도 내 글엔 긴 공백이 자리한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싶은 오만한 마음이 함부로 끼어든다. 잠들기 전에 오늘은 꼭 한 편 써야지. 섭취한 카페인만큼 밀려나는 수면시간. 우울을 쥐고 온 불면증이 젖은 혓바닥으로 나를 덮는다. 밀린 일기를 재촉하는 아이가 올텐데.




중학교에 갓 입학한 우리는 들떴다. 초등을 등지자 조금은 어른이 된 느낌. 품이 큰 교복 안에는 성장에 대한 기대가 담겨있었다. 낯선 얼굴들에 겁을 집어먹기도 잠시, 순수함이 거절당하는 일은 없었다. 


마침 새로운 나의 담임선생님도 막 교사로서 첫 발을 내딘 새내기였다. 하나의 반으로 엮인 '우리'는 제법 좋은 호흡을 나눴다고 기억한다. 비록 그의 간곡한 반장 권유를 여러 번 거절했지만, 아이들보다 영롱했던 눈이 꽤나 따뜻한 사람이었다. 


열의 넘치는 신입 교사가 제안한 학급 일기는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대략 40명을 나눈 다섯 개의 조 앞으로 일기장 하나가 주어졌다. 우리는 그렇게 짜인 조 안에서 순서를 정해 하루씩 일기를 써야 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해치워야 할 숙제가 새로 생긴 셈이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학급 일기는 제안보단 통보라는 말에 적합했다. 민주적이지 않았던 그 절차는 거센 반발을 낳았고 그것을 증명하듯 아이들은 모두 성실하지 못했다. 일기장은 친구에게 적는 농담, 낙서와 노랫말 등으로 채워져 다음 사람에게 넘겨졌다. 


방학숙제인 독후감 다섯 편을 개학 전 날 부리나케 해치우던 나라고 달랐을까. 매일 네다섯 편의 일기에 빨간 펜으로 꼬박꼬박 답하던 선생님만 열심이었다. 사실 불성실의 원인이 오롯이 젊은 교사의 독단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각자의 역할이 공평하게 나뉜 청소시간의 모습들. 저마다 도구를 쥔 채, 제 몸만 한 책가방을 등에 메고. 손에 든 도구의 쓰임과는 상관없이 모여 있는 무리들이 귀가를 미루던 시절이었다. 감시의 볕이 미치지 못한 곳에선 책임감이 싹 틔우지 못하던 나이. 우리는 어렸고, 철없는 만큼 겁도 없었다. 선생님이 들이닥치며 애정 어린 잔소리를 늘어놓기 전까지 늘 같은 풍경이었다. 나는 요란한 말소리들을 목도리처럼 두르고 있다가, 문득 갑갑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한 반에 할당된 네 장의 커다란 창문, 세 번째 창문을 정확하게 가르던 그늘의 각도가 아직도 선명하다. 제멋대

로 든 햇볕에 피어오르던 자욱한 먼지들. 그 경계에 서 있었다. 또래보다 조금 큰 체구의 그 아이. 한 뼘 정도 열린 창문 앞, 길게 기른 앞머리가 눈을 숨긴 채 흔들렸다.


소란과는 동떨어진 공간. 마치 당연한 일처럼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시작에 대해선 아무도 몰랐고, 그렇게 모두가 지내왔다. 그저 시선은 폭력을 내재했다. 무관심 위로 솟아난 얇은 눈초리들은 상처를 남기고, 오랜 흉터를 그렸다. 사춘기, 서로에게 지나칠 만큼 기울이던 관심 한 조각 떨어지지 못한 자리. 


언젠가부터 가득했지만, 내게 닿지 못했던 지난날의 죄악. 삐걱거리는 나무 장판에서 덜 마른 왁스 냄새가 났다. 교실을 가득 채운 소음에 묻혀있던 의자 끄는 소리가 선명해지고, 마침내 아이의 손에 의해 한 줄의 책상들이 정리됐다. 교탁에서 보인 그 불균형이 역했다. 아이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고 내 몸은 형체 없는 공포에 떨렸다. 


아마도 비겁하게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어린 아이였던 내겐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최선이었다. 알량한 정의감에 나를 감추고 싶었다. 나는 달랐다는 비겁한 위안. 때마침 찾아온 학급 일기의 순번. 붙잡는 말들을 뿌리치고 이른 귀가를 자청했다. 손끝에 눌어붙은 눅진한 마음들을 내어 썼다. 중지 끝 굳은살이 무르익지 않아 손이 아파왔지만, 그래도 적어야만 했다. 


글이라고는 숙제로 내어진 일기와 독후감밖에 써본 적이 없었다. 그 덕에 텅 빈 공간을 채우는 법을 알지 못했다. 친구란 단어의 정의를 사전에서 빌려왔다. 또 어렴풋한 교과서 속 시의 형태를 흉내 내며 모자란 글솜씨가 부끄러운지도 모른 채 써 내려갔다.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 배운 낯간지러운 정답들과 '우리'에게 생긴 구멍 난 오늘에 대해. 부족한 포장은 어린 진심에 맡겼다. 우리가 수용하는 범위는 어디까지였을까.


일기를 제출했고, 부끄러운 민낯의 글은 전체 학급 일기에 정갈히 프린트되어 붙어있었다. 




누구도 잘못되지 않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하루들. 그 모두가 일그러진 교실 위에 얹혀 있었다.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던 초보 선생님 또한 너무 어렸다. 달라질 오늘에 대한 기대는 새벽 공기가 걷히며 얼마나 많은 실망이 되었을까. 돌아서면 잊힐 얄팍한 우정으로 우리는 감당 못할 벽을 쌓아 올렸다. 


참 오래도 걸렸다. 그 날 이후로도, 다름을 온전하게 인정하기까지. 기대 없는 솔직한 응원을 건넬 수 있기까지 말이다. 덕분에 나는 쓸데없는 말을 전부 버릴 수 있게 됐다. 관심 언저리에서 방황하던 어린 발걸음이 무관심에 이웃하게 됐다. 누군가의 긴 하루의 끝에 닿을 종착역이 될 수 있도록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다.



간혹 썩은 내가 난다. 착하다는 말을 욕심내고 저 혼자 취할 때면 가눌 수 없이 역겨워지는 날이 있다. 타인의 칭찬이 가면 위에 놓일 때면 소금 뿌린 미꾸라지처럼 진저리치며 부정하게 된다. 나의 기저에 늘러붙은 하찮은 양심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 것이 아닌 자격 없는 위안이다.


그러니까 나는 글을 써야만 한다. 참회록같은 훌륭한 마음은 아닐지라도, 진실된 마음으로 잊지 않았으면 하니까. 내가 마주하지 못했던 하루들을 되뇌인다. 선생님께 용기를 빌려 건넨 인사에 존댓말이 돌아왔었다. 그 낯섦에 덜컥 겁을 먹던 소년이, 잠 못드는 밤이면 종종 찾아온다. 그를 붙잡기 위해 발전 없고 어설픈 글을 느즈막히 내민다.


이렇게 응고된 시간에 침을 바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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