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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가 있는 밤 Feb 20. 2024

기발한 명작 <웰링턴 공작의 초상>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라는 말에 동의하는가. 영화 <웰링턴 공작의 초상>을 보고 나면 다른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여기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 무려 14만 파운드에 해당하는 내셔널 갤러리의 세계적인 명화를 훔친 사람이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켐프턴 번턴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 보자.


누군가가 순수하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명화를 훔쳤다고 한다면 믿겠는가. 1961년, 영국 뉴캐슬에 사는 켐프턴 번턴은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린 웰링턴 공작의 초상화를 훔쳤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잠시 ’빌린‘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순도 100% 선의에 기반한 절도였기 때문이다.


그가 명화를 대여한 이유는 바로 노인들의 텔레비전 수신료 때문이다. 그는 영국 공영 방송국인 BBC의 방송을 보지 않음에도 텔레비전 기기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신료를 내야 한다는 사실에 반대했다. 그 대가로 열흘 넘게 감옥에 간 그는 1인 시위를 하기에 이른다. 뉴캐슬의 거리에서 켐프턴은 노인들, 특히 과거 전쟁에 참전했으나 현재 연금으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이 텔레비전 수신료를 면제받도록 요구하는 시위를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직접 런던에 가 의회 및 방송국에 여러 번 찾아가지만 모두 문전박대당한다.


그래서 켐프턴은 방법을 고심하던 중 우연히 뉴스에서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이 화제가 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내셔널 갤러리로 향한다. 밤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그림을 훔친 켐프턴은 자신의 방 옷장 뒤에 어설프게 그림을 숨겨 두고 보다 적극적인 사회 운동가가 된다. 그는 사는 곳을 들키지 않기 위해 거주지인 뉴캐슬이 아닌 버밍엄 등 다른 지역에 가서 자신의 요구사항을 담은 편지를 경찰들에게 보낸다. 그러나 그의 요구사항은 그림에 대해 얼마를 달라는 일반적인 절도범들의 요구와는 다르다. 여전히 켐프턴은 공익과 사회적 복지를 주장하는 그의 이상을 담아 편지를 지어 보낸다.


그렇게 그림을 숨기면서 켐프턴은 빵 공장에 취직해 일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의 로빈 후드와 같은 성격이 고개를 든다. 당시 파키스탄 출신의 동료 노동자가 부당한 인종 차별을 당하며 제도적으로 보장된 휴식 시간마저 빼앗기자 켐프턴은 마하트마 간디의 말을 인용하며 상사에게 맞선다. ”누구의 더러운 발도 내 마음 위를 지나갈 수 없다“는 간디의 말에 따라 켐프턴은 부당한 차별을 참지 않고 그의 동료를 위해 정의와 평등을 대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언사 때문에 켐프턴은 해고되고 다시 무직 상태에 이른다.


그 후 시간이 지나 그림이 발각 위기에 처하자 켐프턴은 제발로 내셔널 갤러리에 찾아가 곱게 그림을 되돌려준다. 여기서부터 그에 대한 판결이 매우 흥미롭다. 그는 자백 후 체포되어 법정에 선다. 그의 재판 과정은 기적으로 가득하며 그가 정말 선의를 위해 평생을 노력해왔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동시에 법도 결국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메시지도 담겨 있다.


흔히 알고 있는 법 상식에 따르면 나의 소유물이 아닌 것을 가져갔다면 그것은 절도요,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만약 그 물건을 되돌려 주었다면 어떨까? 우리가 이웃의 잔디깎기를 빌려 갔다가 되돌려 놓는다면 그것은 절도가 아니라는 극중 변호사의 말이 떠오른다. 켐프턴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영구적으로 명화를 소유할 목적으로 훔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명화를 통해 금전적 이익을 얻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가 그림을 가져가 잠깐 대여하고 있었던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의 텔레비전 수신료를 내기 위함이었다. 그가 편지를 보낸 신문사나 경찰이 제안하는 돈이라면 3500가구 정도의 노인 가정의 텔레비전 수신료를 부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첫머리의 1인 시위가 이렇게 재판으로 연결되고, 켐프턴의 재판 과정은 딱딱한 법이나 추궁보다는 유머로 가득하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결국 배심원들과 방청객들은 모두 켐프턴의 절도 혐의를 무죄라고 느꼈고, 12명 배심원들의 만장일치로 켐프턴은 무죄 선고를 받는다. 명화를 훔치고 개인적 이익을 도모하려 했다는 등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은 것이다. 그가 유일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혐의는 바로 명화의 액자 프레임을 훔친 것이었다. 그는 액자만 훔친 죄로 3개월간 감옥에서 복역하고, 켐프턴의 무죄 선고에 방청객들은 환호성을 내지른다. 여기에는 켐프턴이 인종 차별에 맞서준 파키스탄 노동자도 있고, 켐프턴의 아내 도로시가 일하는 사모님인 뉴캐슬 시 의원의 아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켐프턴의 노력에 힘입어 실제로 2000년에 노인들의 텔레비전 수신료가 면제되는 새로운 법이 제정되었다. 극중 계속해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비판하는 희곡을 쓰던 켐프턴은 결국 희곡 작가는 되지 않았지만, 그는 평생 동안 사람들의 권리에 대해 노래했다.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많은 울림을 준다. 60여 년이 지났지만 아무 대가 없이 선의를 위해 노력한 켐프턴 번턴의 이야기는 법도 그것의 보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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